영화 · 2026

아버지의 집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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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리는 왜 부엌에서 가장 먼가

지도대장· 2026. 10. 12.· 3,102자

집 안에서 밥을 짓는 자리와 밥을 먹는 자리는 왜 떨어져 있을까. 연기와 냄새 때문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절반만 맞다. 나머지 절반은 그 사이를 누가 건너다니느냐에 있다. 두 자리가 떨어져 있으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거리를 오가야 한다. 그 사람이 그 집의 일을 맡은 사람이다.

공간에서 동선이 가장 긴 사람이 그 조직의 노동을 떠맡는다. 식당에서 주방과 홀 사이의 문을 가장 많이 여는 사람이 그렇고, 교실에서 분단 사이를 걷는 사람이 그렇고, 사무실에서 복사기 앞에 가장 자주 서는 사람이 그렇다. 반대로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그 사람의 지위는 높다.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 권력이다. 이것은 평면도만 펼쳐 놓아도 대체로 읽힌다.

「아버지의 집밥」은 이준익이 연출한 2026년 작품이다. 고리타의 레진코믹스 웹툰이 원작이고 극장판은 146분이다. 9월 9일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개봉했다. 정진영이 아버지 하응을, 이정은이 아내 순애를 맡았다. 아들 명복은 변요한이, 며느리 자영은 박지연이 연기했다. 줄거리를 공간으로 줄이면 이렇다. 상의 안쪽에 앉아 있던 사람이 부엌으로 걸어 들어간다. 거리로는 몇 걸음이고, 시간으로는 사십 년이다.

아버지의 집밥 스틸컷

이 작품은 세로로 찍혔다. 극장 스크린의 삼분의 일쯤만 쓴다. 가로 화면이 평면도에 가깝다면 세로 화면은 단면도에 가깝다. 좌우의 배경이 잘려 나가고 위아래가 남는다. 그래서 누가 높은 자리에 있고 누가 낮은 자리에 앉았는지가 먼저 보인다. 형식이 이 영화의 주제를 미리 골라 놓은 셈이라고 볼 수 있다.

화면 양옆에 남는 빈 자리도 공간이다. 프레임은 벽과 같은 일을 한다. 무엇을 보여 줄지보다 무엇을 잘라 낼지를 정한다. 좌우를 잘라 내면 집이 얼마나 넓은지는 알 수 없게 된다. 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또렷해진다. 이 영화가 재는 것은 평수가 아니라 간격이다.

먼저 밥상이라는 공간을 보자. 이 집의 상은 붉은 교자상이다. 한 사람이 안쪽 가운데에 앉고 나머지가 그를 둘러싼다. 둘러앉은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가운데로 모인다. 구조만 보면 이 배치는 교단과 닮았고 법정의 판사석과 닮았다. 차이는 목적이다. 교단은 가르치려고 그렇게 놓이고 상은 먹으려고 그렇게 놓인다. 다만 배치가 같으면 효과도 얼마간 같아진다.

아버지의 집밥 포스터

이 집의 아버지는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을 엎었다. 상을 엎는다는 것은 공간 하나를 통째로 없애는 일이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상에서 가장 안쪽에 앉은 사람뿐이다. 바깥쪽에 앉은 사람은 상을 치울 수는 있어도 엎을 수는 없다. 치우는 자리와 엎는 자리의 차이가 그 집의 구조다.

이제 부엌을 보자. 이 집의 부엌은 좁다. 냉장고와 전자레인지와 나무 찬장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고 창이 하나 나 있다. 어른 한 사람이 돌아설 만한 폭이다. 사십 년 동안 이 집이 아내에게 내어 준 자리는 그 한 칸이었다. 조직이 내주는 책상의 크기가 그 사람의 자리이듯, 집이 내주는 방의 크기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 부엌에는 창이 하나 나 있다. 레이스 커튼이 달린 작은 창이다. 창은 벽에 뚫린 구멍이지만 하는 일은 벽과 반대다. 벽은 가두고 창은 내보낸다. 사십 년 동안 그 자리에 선 사람에게 바깥은 대체로 그 한 폭이었을 것이다. 남자가 같은 자리에 서면서 그 폭도 함께 물려받는다.

방향도 보자. 상에 앉은 사람은 부엌을 등지고 앉는다. 부엌에 선 사람은 상을 등지고 선다. 두 사람은 같은 집에 있으면서 서로의 뒷모습만 본다.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자리와, 보이지만 볼 수 없는 자리가 한 집 안에 나뉘어 있는 것이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서는 순간 이 방향이 뒤집힌다. 처음으로 그가 등을 보이는 쪽이 된다.

이 집에서 가장 자주 지나는 길은 부엌과 상 사이다. 몇 걸음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몇 걸음을 사십 년 동안 한 사람만 걸었다. 짧은 길일수록 누가 걷는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 긴 복도는 눈에 띄지만 다섯 걸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집 안의 불평등은 대개 그렇게 짧은 거리 안에 숨어 있다.

작은 식탁 장면도 있다. 레이스 식탁보가 깔린 두 사람짜리 식탁이고 부부가 마주 앉는다. 둘러앉는 상과 마주 앉는 상은 성격이 다르다. 둘러앉으면 가운데가 생기고 마주 앉으면 가운데가 사라진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시선은 쌍방이 된다. 교자상에서 두 사람짜리 식탁으로 옮겨 앉는 것만으로 관계의 평면이 한 번 바뀐다고 읽을 수 있다.

거실 장면에서 아버지는 소파 위에 앉아 있고 아들은 그 앞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 높이 차이는 한 뼘 남짓이다. 그 한 뼘이 두 사람 사이의 순서를 말해 준다. 아들은 자기 집에서는 가장이지만 이 집에서는 올려다보는 자리에 앉는다. 자리는 사람을 따라다니지 않는다. 사람이 그 집에 정해진 자리를 찾아 앉을 뿐이다.

아들 명복과 며느리 자영의 살림은 이 집과 다르게 짜여 있다. 누가 부엌에 서는지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한 세대 사이에 평면이 바뀐 것이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정해진 자리에서 하는 것과 번갈아 하는 것은 다르다. 앞의 것은 신분에 가깝고 뒤의 것은 당번에 가깝다.

아내가 사고 뒤에 요리하는 법만 잊으면서 이 집의 평면이 한 번 무너진다. 사십 년 동안 비어 본 적이 없는 자리가 빈다. 남자는 그 빈자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공간이 사람의 성격을 바꾸지는 않는다. 다만 동선을 바꾼다. 그리고 동선이 오래 바뀌면 결국 사람도 바뀐다고 볼 수 있다.

후반부에 아내는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고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는다. 그 뒤로 남자는 매일 상을 차린다. 이제 그는 한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 집에서 부엌과 상 사이를 가장 많이 오가는 사람이 되었다. 첫 장면에서 그는 움직이지 않는 자리에 있었다. 마지막에 그는 가장 많이 움직이는 자리에 있다. 높이로 보면 내려온 것이고 동선으로 보면 길어진 것이다.

공간으로 보면 이 영화는 한 사람이 자기 집에서 동선을 얻는 이야기다. 사과하는 장면보다 걸어 다니는 장면이 더 많은 화해라고 할 수 있다. 말로 하는 화해는 한 번이면 끝나지만 동선으로 하는 화해는 매일 다시 해야 한다. 그 점에서 집밥은 이 이야기에 잘 맞는 소재다.

우리 집에도 같은 평면이 깔려 있을 것이다. 다음에 집에서 밥을 먹을 때 상과 부엌 사이를 누가 몇 번 오가는지 세어 보기 바란다. 세어 보면 그 집의 평면도가 한 장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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