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아버지의 집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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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는 말

즉흥한모금· 2026. 10. 12.· 2,417자

사십 년 동안 한 사람이 하루 세 번 밥을 지었다. 그동안 그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노동이 그렇게 끝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그 노동의 유일한 성적표다. 그리고 그 성적표는 아무도 읽지 않는다.

「아버지의 집밥」은 이준익이 연출했다. 고리타의 레진코믹스 웹툰이 원작이고 극장판은 146분이다. 9월 9일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개봉했다. 정진영이 아버지 하응을, 이정은이 아내 순애를 맡았다. 아들 명복은 변요한이, 며느리 자영은 박지연이 연기했다. 사십 년 동안 삼시세끼 집밥만 받아먹던 남자가, 아내가 요리하는 법을 잊은 뒤 생애 처음으로 부엌에 선다. 그게 전부다. 이 영화는 그 이상을 하려 들지 않는다.

아버지의 집밥 스틸컷

세로로 찍은 영화다. 극장 스크린의 삼분의 일쯤만 쓴다. 본래 회차로 나뉜 숏드라마였고 극장판은 그것을 이어 붙인 것이다. 제작비는 오억 원 안팎이고 서른세 명이 열네 회차로 찍었다. 작은 영화다. 작게 만든 영화가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미덕이다.

제목은 아버지의 집밥이다. 집밥이라는 말에는 공이 들어 있지 않다. 집에서 먹는 밥이라는 뜻일 뿐이다. 그 말이 사십 년 동안 누구의 손을 가려 왔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말이 그 앞에 붙는 순간 가려져 있던 것이 드러난다. 이 영화는 자기가 할 말을 제목에서 이미 한 번 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의 끝을 안다고 믿는다. 남자가 뒤늦게 깨닫고 여자가 울면서 용서한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지난 사십 년이 갚아진다. 갚아지지 않는다. 사십 년은 두 시간 반 안에 들어가는 분량이 아니다. 이 영화는 그것을 알고 있다.

영화가 넣지 않은 것들이 있다. 눈물을 짜내려고 설계한 장면을 앞세우지 않는다. 부부가 주고받는 말 한마디에서 웃음을 먼저 꺼낸다. 병이 낫는 전개도 없고 기적도 없다. 그런 장면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끼니뿐이다.

이 영화가 아끼는 것은 속도다. 깨달음을 한 번에 주지 않는다. 한 끼마다 조금씩 나눠 준다. 끼니는 하루에 세 번 돌아오고 깨달음도 그만큼 잘게 쪼개진다. 한꺼번에 오는 각성은 대개 가짜다. 잘게 오는 깨달음이 대개 진짜다.

아내가 길에서 쓰러지는 장면이 있다. 남자는 정밀검사를 미룬다. 그에게는 그때까지도 밥이 먼저다. 부당하다. 나는 그 장면에서 화가 나지 않았다. 화를 내려면 그것이 예외여야 한다.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집은 많았고 지금도 어딘가에 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순애는 울지 않는다.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사십 년이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를 불쌍한 사람으로 내놓지도 않는다. 대신 점수를 매긴다. 맛이 없으면 일 점을 주고 열 점이 되면 이혼하겠다고 통보한다.

나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피해자 노릇은 쉽다. 쉬운 만큼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순애가 고른 것은 규칙이다. 규칙은 상대를 움직이게 만든다. 울음은 상대를 미안하게 만들 뿐이다. 미안해하는 사람은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집밥 포스터

이 영화는 용서를 다루지 않는다. 용서는 가해와 피해가 또렷할 때 쓰는 말이다. 이 집에서 벌어진 일은 그렇게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남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모르는 것도 죄가 된다. 다만 그 죄는 사과 한 번으로 갚아지는 종류가 아니다.

남자도 변명하지 않는다. 사십 년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냥 실패한다. 다음 끼니에 또 실패한다. 그리고 다시 부엌에 선다. 앞치마를 두르고 비닐장갑을 끼고 손녀 앞에서 김밥을 만다. 나는 그것이 사과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사과는 한 번이면 끝나기 때문이다.

갚을 수 없는 것 앞에서 사람은 둘 중 하나를 한다. 포기하거나 반복한다. 남자는 반복을 골랐다. 반복은 감동적인 선택이 아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 남는 것이다. 나는 그런 자리에서 나온 선택을 더 신뢰한다.

아들 부부의 살림은 이 집과 다르게 굴러간다. 누가 부엌에 설지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영화는 두 집을 놓고 어느 쪽이 옳다고 판정하지 않는다. 젊은 날의 두 사람과 지금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여 줄 뿐이다. 그래서 누구도 간단히 틀렸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판정하지 않는 쪽이 대체로 더 정직하다.

약점도 있다. 하려는 말을 인물의 입으로 여러 번 설명한다. 보여 준 것을 다시 말로 일러 주는 장면은 영화를 얇게 만든다. 세로 화면도 끝까지 완전히 편해지지는 않는다. 그 정도다.

아내는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고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는다. 그 뒤로 남자는 매일 상을 차린다. 기억이 줄어드는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서, 내일이면 잊힐 밥을 오늘 짓는다. 대단한 장면이 아니다. 돌려받을 것도 없다. 나는 대단하지 않아서 좋았다.

지금 누군가의 끼니를 매일 차리고 있는 당신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아무도 그 횟수를 세지 않는다. 고맙다는 말은 늦게 온다. 오지 않기도 한다. 그래도 차려진 밥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먹은 사람 안에 남는다. 밥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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