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1

브리짓 존스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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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짓 존스의 일기

활보러· 2026. 10. 13.· 3,537자

브리짓 존스는 서른둘이고 혼자 삽니다. 런던의 출판사에서 홍보 보조로 일하고, 상사인 다니엘 클리버를 멀리서 보며 공상하는 게 업무의 절반이죠. 새해에 부모님 집 파티에 끌려갔다가 어릴 때 알던 마크 다아시를 다시 만나는데, 마크는 변호사이고 브리짓을 대놓고 한심하게 봅니다. 브리짓은 그날부로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담배와 술을 줄이고 살을 빼고 제대로 된 남자를 찾겠다는 결심이 첫 장에 적히죠. 그 뒤로는 직장에서 다니엘과 가까워지고, 마크와는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식으로 한 해가 갑니다.

원작은 헬렌 필딩이 1995년 인디펜던트에 연재한 칼럼이고, 이듬해 소설로 묶였습니다. 소설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현대 런던으로 옮긴 것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죠. 남자 주인공 이름이 다아시인 걸 보면 숨길 생각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각본은 필딩 본인과 앤드루 데이비스, 리처드 커티스 세 사람이 썼고, 연출은 샤론 매과이어가 맡았습니다. 커티스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과 「노팅 힐」을 쓴 사람이고, 제작사도 같은 워킹 타이틀이에요. 러닝타임은 97분입니다.

캐스팅 쪽 맥락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앤드루 데이비스는 1995년 BBC 「오만과 편견」을 각색한 사람이고, 그 드라마에서 다아시를 연기한 배우가 콜린 퍼스였죠. 필딩은 칼럼을 쓰던 시기에 그 다아시를 보며 마크 다아시의 윤곽을 잡았다고 하고, 퍼스가 영화의 다아시 역을 받아들이는 데는 데이비스가 각본에 참여한 사정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배우를 보고 만든 인물을 그 배우가 다시 연기하는 구조예요. 농담치고는 꽤 공들인 농담입니다. 다행히 영화는 이 사실을 대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스틸컷

한 여자와 두 남자가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는 대개 두 가지 길로 갑니다. 하나는 누가 나쁜 남자인지 관객에게 처음부터 알려 주고 주인공만 늦게 알게 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둘 다 그럴듯하게 그려 놓고 선택을 끝까지 미루는 길이죠. 이 영화는 첫 번째 길입니다.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지는 휴 그랜트가 책상 너머로 몸을 기울이는 순간 다 보이거든요. 그래도 덜 뻔하게 느껴지는 건 소설이 오스틴에게서 통째로 빌려 온 장치 덕분입니다. 다니엘은 마크가 자기 약혼녀와 바람을 피웠다고 브리짓에게 말하는데, 나중에 사실은 반대였다는 게 드러나죠. 「오만과 편견」에서 위컴이 하던 역할입니다. 다만 거기서는 다아시의 긴 편지가 하던 정정을 여기서는 브리짓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해치웁니다. 효율적이긴 해요.

직업 설정은 두 개인데, 둘 다 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쓰인 건 적습니다. 출판사 홍보 일은 작가와 기자와 책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이라 소동을 만들기 좋은 자리죠. 르네 젤위거가 촬영 전에 실제 출판사 홍보부에서 일해 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이 직장에서 건지는 건 세 장면입니다. 다니엘과의 사내 연애, 출판 기념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살만 루시디와 제프리 아처를 차례로 모욕하는 연설, 그리고 동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사표를 던지는 장면이요. 책은 거의 안 나옵니다. 사무실은 다니엘이 서 있을 배경으로 쓰이죠.

브리짓 존스의 일기 포스터

두 번째 직장인 아침 방송 「Sit Up Britain」은 좀 낫습니다. 면접에서 전 직장 상사와 잤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채용되는 장면부터 방송국이 어떤 곳인지 정해 두거든요. 유명한 소방서 장면은 생방송 중에 봉을 타고 내려오다 카메라맨 위로 떨어지는 건데, 카메라맨 시점으로 찍은 샷 하나로 웃음을 다 가져갑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브리짓이 리포터로 자리를 잡는 계기는 마크가 자기가 변호하는 사건의 단독 인터뷰를 그녀에게 내주는 것이에요. 일로 뭔가를 해낸 게 아니라 남자가 일감을 가져다준 셈이죠. 소방서 봉까지는 브리짓의 것이고 그 뒤 경력은 마크의 선물입니다. 장르의 관습이 직업 설정을 이기는 지점이에요.

통하는 건 두 남자의 길거리 싸움입니다. 브리짓의 생일 저녁에 친구들과 마크가 앉아 있는데 술 취한 다니엘이 찾아오고, 마크가 밖으로 나가자고 하죠. 둘은 보도에서 서로 밀치고 머리채를 잡고 헛발질을 하다가 식당 안까지 밀고 들어갑니다. 안에서는 종업원들이 어느 손님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고 있고, 둘은 결국 유리창을 뚫고 다시 거리로 나옵니다. 배경 음악은 「It's Raining Men」이에요. 두 배우가 스턴트 코디네이터를 방 밖에 두고 직접 짰다는 장면인데, 그랜트는 중산층 영국 남자 둘이 싸우면 이렇게 될 거라고 했고 퍼스는 겁먹은 여피 둘이 주먹을 제대로 쓸 리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찍혔습니다. 마지막 한 방은 마크가 날리는데, 브리짓은 그걸 보고 마크를 나무라죠. 삼각관계 영화에서 주인공이 그 자리에서 둘 다 돌려보내는 장면은 드물어요.

걸리는 건 음악입니다. 첫 장면에서 브리짓이 집에서 혼자 「All By Myself」를 따라 부르는 건 그 자체로 농담이니 넘어가도, 그 뒤로도 중요한 대목마다 가사가 상황을 설명하는 팝송이 깔립니다. 싸움 장면의 「It's Raining Men」도 같은 방식이죠. 한두 번은 재치고 계속되면 자막입니다. 패트릭 도일의 스코어가 따로 있는데 팝송 사이에서 자리를 못 잡아요. 느린 화면도 좀 있습니다. 관객이 알아서 느낄 거라고 영화가 믿지 못하는 순간들이죠.

젤위거는 미국 배우가 영국 여자를 연기한다는 사전 반발을 몸으로 넘깁니다. 억양은 코치와 몇 달을 준비했다고 하고, 체중을 불렸고, 토끼 의상을 입고 갔더니 평상복 파티로 바뀌어 있더라는 장면 같은 신체 개그를 전부 직접 받아냅니다. 그랜트는 평소의 페르소나를 뒤집어 입은 것처럼 보이는데, 같은 미소를 쓰면서 뜻만 바꿉니다. 퍼스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게 이 역할의 요구이기도 하고, 1995년의 다아시를 본 관객이 알아서 채워 넣을 거라는 계산이기도 합니다.

주변 인물을 세어 보면 이렇습니다. 친구가 셋인데 여자 둘, 남자 하나예요. 주드, 셰저, 톰이고, 셰저는 감독 매과이어가 모델이라고 합니다. 이 셋이 하는 일은 전화를 받고, 식탁에서 조언하고, 마지막에 파리행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사정은 거의 나오지 않아요. 부모는 둘이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서브플롯이 있는데 이 이야기의 진짜 기능은 다니엘의 거짓말을 바로잡는 정보를 전달하는 겁니다. 마크 쪽에는 동료 나타샤가 있고, 다니엘 쪽에는 미국인 동료 라라가 있어요. 각각 장애물 한 명씩입니다. 짐 브로드벤트와 젬마 존스, 셜리 헨더슨이 이 정도 분량에 쓰인 건 좀 아깝습니다.

하여간 로맨틱 코미디가 해야 할 일은 다 합니다. 두 남자를 세워 놓고, 오해를 심고, 눈 오는 거리에서 푸는 데까지 97분이면 넉넉하죠. 직업과 친구들이 더 쓰일 수 있었다는 건 분명한데, 그걸 기대하고 보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 정도면 됐죠.

(덧) 카메오가 넷입니다. 살만 루시디, 제프리 아처, 줄리언 반스, 아너 블랙먼이에요. 출판 기념회 장면에 작가 셋을 실제로 데려다 놓은 건 출판사 설정이 그나마 제일 잘 쓰인 순간입니다.

(덧) 제목의 일기는 결말에 소품으로 돌아옵니다. 마크가 식탁에 펼쳐진 일기를 읽고 나가고, 브리짓이 눈 속을 쫓아가고, 마크는 새 일기장을 사 들고 서 있죠. 일기가 영화 안에서 무언가를 하는 건 사실상 그 장면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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