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1
브리짓 존스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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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누가 읽으라고 쓰는 것인가
나는 해마다 12월에 다이어리를 산다. 1월 첫 주는 빽빽하다. 둘째 주는 성글다. 셋째 주부터는 백지다. 그러니까 내 다이어리는 열두 달짜리 공책이 아니라, 2주짜리 공책에 열한 달 반의 여백이 딸려 오는 물건이다. 그래도 산다. 백지도 어쨌든 기록이라고 우기면서.
그런 내게 이 영화는 다이어리를 끝까지 쓴 사람의 이야기로 보였다. 새해 첫날 어머니의 칠면조 카레 뷔페로 시작해, 눈 내리는 거리에서 새 일기장을 건네받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다. 서른두 해째 싱글인 브리짓은 뷔페에서 돌아와 자동응답기를 켠다. 메시지가 없다. 그는 이대로라면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계가 와인 한 병과 맺는 관계가 될 것이며, 결국 혼자 죽어 3주 뒤 알세이션 개에게 반쯤 뜯어먹힌 채 발견되리라고 예감한다. 그래서 일기를 쓰기로 한다. 자기에 관한 진실을, 진실 전부를 적겠다고 한다. 결심 1번, 20파운드 감량. 2번, 어젯밤 벗은 속옷은 세탁 바구니에. 그리고 알코올중독자, 일중독자, 결혼기피자, 관음증자, 과대망상자와는 사귀지 않기. 상사 다니엘은 이 목록의 어느 칸에 들어가는지 확인해 보려는 듯 등장하고, 변호사 마크는 뷔페에서 브리짓을 두고 험담한 사람으로 먼저 등장한다.
두 남자의 퇴장 방식이 묘하게 닮았다. 다니엘은 어느 날 뉴욕 지사에서 온 라라를 데려와 약혼했다고 알린다. 브리짓은 회사를 그만둔다. 마크는 부모의 결혼기념 파티에서 뉴욕 로펌의 파트너로 초빙되었다는 발표를 듣고 서 있고, 동료 나타샤가 함께 간다는 말이 뒤따른다. 이 영화에서 뉴욕은 도시가 아니라 출구의 이름이다. 그리고 출구를 끝내 쓰지 않는 쪽이 누구인지가 이 영화의 승부다. 마크는 나중에 브리짓의 집에 나타나 뉴욕행을 취소했다고 말한다. 뉴욕 대신 근처 가게로 가서 일기장을 사는 남자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이 영화의 일기는 문장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숫자로 시작한다. 11월 9일. 체중 138파운드. 담배 3개비. 생일 33. 12월 25일. 체중 140파운드, 더하기 민스파이 42개. 알코올 단위는, 오, 수천. 그러니까 이 일기는 일기라기보다 장부다. 들어온 것과 나간 것을 적는다. 몸무게가 자산이고 담배와 술이 지출이다. 어느 날 담배가 세 개비로 줄면 장부는 흑자고, 크리스마스에 민스파이가 마흔두 개 들어오면 장부는 파산이다. 나는 이 숫자들을 보며 체중계에 올라갈 때 숨을 참는 내 버릇을 떠올렸다. 숨을 참아도 체중계는 모른다. 그래도 참는다.

적는다는 것은 센다는 뜻이다. 센다는 것은 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기준이 있다는 것은 심판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장부에서는 피고와 검사와 판사가 한 사람이다. 브리짓은 자기를 감시한다. 매일 아침 자기 몸을 저울에 올리고, 담배꽁초를 세고, 잔을 센다. 새해 결심이라는 제도가 하는 일이 이것이다. 1월 1일 0시에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감사관으로 취임한다. 임기는 대개 1월 중순까지다. 브리짓이 특별한 것은 결심을 지켜서가 아니다. 감사관 임기를 1년 내내 채워서다. 숫자는 한 번도 좋아지지 않는데 기록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성실? 강박? 혹은 그저 습관?
그러나 감시 일지로 보기에 이 일기는 결함이 많다. 민스파이 마흔두 개를 적는 사람은 반성 중인가, 자랑 중인가. 알코올 단위에 수천이라고 적는 사람은 세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리고 숫자 뒤에는 꼭 욕이 한마디 붙는다. 장부라면 욕을 적지 않는다. 욕을 적는 순간 장부는 다시 일기가 된다. 브리짓은 자기를 감시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었는지 모른다. 감사관이 피감사인을 너무 좋아하면 감사는 실패한다. 이 영화의 일기는 그렇게 실패하는 감사다. 그래서 읽을 만하다.
영화 한가운데에 이 장부를 통째로 무효화하는 대사가 있다. 친구의 저녁 모임에서 마크가 브리짓을 따로 불러낸다. 그는 말을 더듬는다. 겉보기와 달리 당신이 아주 좋다고 한다. 브리짓은 흡연과 음주와 천박한 어머니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버릇을 빼고 그렇다는 말이냐고 받는다. 그가 답한다.
No. I like you very much. Just as you are.
친구들의 반응이 이 대사의 무게를 잰다. 있는 그대로? 더 날씬하지 않아도? 더 똑똑하지 않아도? 가슴이 조금 더 크고 코가 조금 더 작지 않아도? 이 질문 목록은 사실 브리짓의 일기장 첫 장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일기의 첫 결심이 20파운드를 빼겠다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자. '있는 그대로'는 일기의 반대말이다. 일기는 있는 그대로를 고치겠다는 문서이고, 저 대사는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다. 브리짓은 나중에 이 말을 돌려준다. 당신은 거만하고, 어떤 자리에서든 틀린 말을 하고, 구레나룻 길이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그런데도 좋다고. 상대의 결함을 세어서 되돌려주는 방식이 일기 쓰는 사람답다.
결말은 이 모든 것을 식탁 위에 펼쳐 놓는다. 친구들과 떠나기로 한 파리행을 포기하고 브리짓은 마크와 집에 남는다. 옷을 갈아입으러 방에 들어간 사이, 마크는 식탁에 펼쳐진 일기장을 읽는다. 자기에 관해 적힌 험한 말들을 읽는다. 그리고 나간다. 브리짓은 알아차리고 속옷 바람으로 눈 내리는 거리로 뛰어나간다. 노래가 흐른다. 산도 골짜기도 강도 당신에게 가는 나를 막지 못한다는 노래다. 근처 가게 앞에서 마크를 찾아낸 브리짓이 쏟아 낸다. 미안하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뜻이었지만 너무 멍청해서 그런 뜻으로 쓴 게 아니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It's only a diary. Everyone knows diaries are just full of crap.
마크는 안다고 답한다. 그는 떠난 것이 아니라 새 일기장을 사러 나갔던 것이다. 새로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 속에서 입을 맞춘다. 덧붙이자면 이 눈은 가짜다. 촬영은 2000년 여름부터 가을까지였고, 감독 샤론 매과이어는 「멋진 인생」에서 빌려 온 동화 같은 느낌을 내려고 거리에 인공 눈을 뿌렸다. 1년치 숫자를 적고 나서 받는 백지 위에, 계절까지 지어낸 눈이 내린다. 이보다 더 정직한 결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장면을 느리게 읽으면 일기장이 두 번 방향을 바꾼다. 처음에 일기는 브리짓이 브리짓을 보는 도구였다. 저울과 재떨이와 빈 병을 세는 자기 감시의 장부였다. 식탁 위에서 그것은 남이 브리짓을 보는 창이 된다. 마크가 읽은 것은 포장되지 않은 브리짓,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브리짓이다. 그는 그것을 읽고 나갔다가 빈 공책을 들고 돌아온다. 새 일기장을 준다는 것은 기록을 그만두라는 뜻이 아니다. 계속 적되, 이번에는 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적으라는 뜻이다. 본다는 것은 이렇게 두 겹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과, 남이 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자기를 보는 것. 전자는 감시고 후자는, 글쎄, 관계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나.
그렇다고 새 일기장의 첫 장이 체중으로 시작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영화는 그 첫 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입맞춤에서 끝난다. 나는 이 부재가 영화의 가장 솔직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20파운드를 빼겠다는 결심은 내년 1월 1일에도 어김없이 돌아올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좋다는 말을 들은 다음 날에도 사람은 체중계에 올라간다. 다만 그때 숨을 참는 이유가 조금 달라질지 모른다. 숫자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숫자를 적어 둘 공책이 선물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일기장 대신 기계에게 장부를 맡긴다. 걸음 수, 수면 점수, 화면을 들여다본 시간, 심박수, 지난주보다 몇 퍼센트 덜 걸었는지까지 손목이 알려 준다. 세는 일은 편해졌는데 읽는 사람은 없어졌다. 숫자는 쌓이고 욕 한마디는 적을 칸이 없다. 그것이 나쁜지는 모르겠다. 브리짓의 장부도 1년 동안 한 번도 좋아진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그 장부는 누군가 식탁에서 읽어 주었고, 손목의 장부는 아무도 읽지 않는다. 어느 쪽이 더 외로운 기록인지는 각자 세어 볼 일이다.
올해도 12월이 오면 다이어리를 살 것이다. 1월 셋째 주부터는 또 백지일 것이다. 그 백지를 누가 읽어 줄까를 생각하다가, 백지는 읽을 사람이 없어서 백지인 게 아니라 쓸 사람이 없어서 백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중 하나만 있어도 공책은 채워진다. 나는 어느 쪽이 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공책은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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