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6

나를 충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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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물러나는 버릇에 대하여

삐뚜름관람· 2026. 10. 28.· 2,238자

나는 폐 끼칠까 봐 먼저 빠지는 사람이다. 모임에서 내가 분위기를 망칠 것 같으면 핑계를 대고 일찍 나온다. 아는 사람이 아프면 병문안을 미루다가 때를 놓친다. 그걸 배려라고 부르면서 여태 살았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이 처음엔 반가웠고, 나중엔 얄미웠다.


아무튼 「나를 충전해줘」를 봤다. 재벌 3세 백호랑은 인공 심장에 배터리를 달고 산다. 드라마 작가 나보배는 어릴 때 벼락을 맞은 뒤 몸에 전기가 흘러서, 손이 닿으면 상대가 감전된다. 그래서 흰 장갑을 끼고 다니고, 좋아하는 사람 손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다. 인파에 떠밀려 호랑과 입을 맞췄는데 이 남자만 감전되지 않는다. 호랑은 병원 정전으로 심장이 방전됐다가 보배 덕에 살아나고, 둘은 재수술까지 3개월 동거 계약을 맺는다. 닿으면 충전, 떨어지면 방전. 여기까지는 포스터에 적힌 그대로다.

내가 보배한테서 나를 본 건 설정이 아니라 버릇이다. 보배를 맡은 배우는 인터뷰에서 이 사람이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능력을 숨긴다고 했다.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숨긴다. 내 핑계와 글자 하나 안 다르다.

나를 충전해줘 스틸컷

차림새부터 그렇다. 곱슬머리는 배우가 보배의 능력을 머리 모양으로 보여 주자고 낸 생각이고, 글 쓸 때 쓰는 안경은 배우가 실제로 갖고 있던 것이라고 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흰 장갑을 낀 채 인파 속에 서 있는 사람. 남들이 들뜬 자리에서 혼자 손을 입에 대고 있는 사람. 내가 모임에서 서 있는 자세와 비슷해서 좀 뜨끔했다.

그 버릇이 가장 크게 나오는 게 공항이다. 톱스타 지은호와의 열애설이 퍼진 뒤, 공항에서 팬들에게 둘러싸인 보배의 전기가 폭주한다. 공항이 통째로 정전되고, 떨어지는 구조물에서 보배를 감싼 호랑이 다친다. 7회에서 보배는 또 소중한 사람을 다치게 할까 겁이 나서 호랑을 밀어낸다. 내가 병문안을 미루는 이유와 같다. 가면 내가 뭘 망칠 것 같아서.

그 전에 하나 더 있다. 제주도 광고 촬영에서 은호가 고백하자 보배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거절한다. 3년을 짝사랑한 사람에게 돌려 말하지 않는다. 나라면 분위기 깨기 싫어서 웃고 넘겼을 자리다. 여기서 이미 보배는 나와 갈라졌는데 그땐 몰랐다.

갈라진 걸 확실히 안 건 기자회견이다. 사촌 최도윤의 계략으로 호랑이 횡령과 비리 의혹 기자회견에 선다. 호랑은 카메라 플래시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밀어내던 보배가 그 자리에 나타난다. 호랑은 회견을 무사히 마치고 고백하고, 둘은 진짜 연인이 된다. 밀어낸 사람이 돌아오는 데 한 회면 됐다. 나는 밀어내면 그걸로 끝이었다.

나를 충전해줘 스틸컷

마지막 회는 한 번 더 한다. 창립기념일에 도윤이 보배와 윤 비서를 외딴 절에 가두고 호랑에게 약을 탄 술을 먹인다. 호랑은 심정지로 쓰러진다. 보배는 평생 숨겨 온 전기로 문을 부수고 나와서, 호랑에게 전기를 전부 쏟아붓는다. 호랑은 살고, 보배의 몸에서는 그 뒤로 전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보배는 또 물러난다. 말없이 대전 부모님 집으로 내려간다. 의사가 보배의 전기가 인공 심장에 과부하를 줄 수 있다고 했으니 이번 핑계는 그럴듯하다. 그런데 호랑이 대전까지 찾아와서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방법은 자기가 찾을 테니 떠나라는 말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한다. 보배는 그 손을 잡고 서울로 돌아간다.

세어 보니 보배는 두 번 물러났고 두 번 다 돌아왔다. 한 번은 제 발로, 한 번은 누가 와 줘서. 그 사이에 문을 한 번 부쉈다. 나는 물러난 자리에서 한 번도 돌아온 적이 없다. 돌아올 만한 일이 없었던 게 아니라 돌아가면 더 민망할 것 같아서였다. 그게 부럽고 얄밉다. 문을 부수는 사람은 대개 문 앞에서 오래 서 있던 사람이다.

후반부 재벌가 암투는 좀 그랬다. 감금에 약 탄 술까지 나오는데 악역은 음주운전으로 잡혀간다. 그래도 그 소동 덕에 보배가 문을 부쉈으니 할 말이 없다. 농담이고, 진심은 이거다. 숨기는 사람은 힘이 없는 게 아니라 쓸 데를 못 정한 것뿐이다.

하나 더 뜨끔한 게 있다. 보배의 전기는 호랑에게만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 한 명은 있었던 거다. 보배는 그걸 인파에 떠밀려 우연히 알았고, 그다음엔 일부러 확인하러 갔다. 나는 내 핑계가 안 통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러 가 본 적이 없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귀찮아서 안 했다. 그게 게으름인지 겁인지 이제 와서 가리기도 민망하다.


다시 고백. 나는 이 글을 쓰고 나서 미뤄 둔 병문안 날짜를 잡았다. 가서 뭘 망치면 망치는 대로 두기로 했다. 문은 안 부수고 그냥 열고 들어갈 생각이다.

나보배, 다음엔 부수기 전에 손잡이부터 돌려 봐라. 그것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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