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극장판 치이카와 : 인어 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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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삯을 떼먹는 법
고백하건대 나는 계약서를 끝까지 읽지 않는 인물들을 몹시 좋아한다. 도장을 먼저 찍고 조항은 나중에 읽는 쪽, 큰 숫자에 눈이 멀어 작은 글씨를 건너뛰는 쪽 말이다. 그런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는 예외 없이 값을 치르게 되어 있고, 나는 그 값을 치르는 대목을 보려고 자리에 앉는 사람이다. 치러야 할 값이 비쌀수록 좋고, 치르는 쪽이 둥글고 작을수록 더 좋다. 이 영화는 그 계산서를 아흔아홉 분에 걸쳐 아주 느긋하게 내민다.
계약은 이르게 체결된다. 종이 한 장이 날아와 토끼의 얼굴에 들러붙고, 거기에는 간단한 토벌 몇 번에 품삯을 백 배로 쳐준다고 적혀 있다. 섬에서만 나는 먹을 것을 거저 준다는 조항도 함께 붙어 있다. 백 배는 이 계약서에서 가장 큰 활자다. 가장 큰 활자가 가장 큰 거짓인 것은 계약서의 오랜 관습이건만, 이 영화는 그 관습을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도장을 찍게 만든다.
도장을 찍는 쪽의 사정도 영화는 짧게 일러 둔다. 작은 주인공은 제초 검정 오 급에 매달려 있는 처지다. 자격증 한 장을 따려고 쩔쩔매는 것 앞에 백 배라는 숫자가 떨어진 것이다. 이쯤 되면 종이 아래쪽의 작은 글씨를 읽을 여유가 없는 것이 당연하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이도록 깔아 두는 일에 영화는 단 몇 컷만 쓴다. 이 정도 미끼는 각본 쓰는 사람이면 눈 감고도 던진다. 문제는 던진 미끼를 끝까지 회수하지 않는 뻔뻔함 쪽이다.
이 영화는 그 계약을 끝내 이행하지 않는다. 일행은 섬을 떠날 때 먹을 것을 한 아름 받아 들고, 백 배라는 숫자는 어디에서도 정산되지 않는다. 보통의 각본이라면 여기서 누군가 따지고, 섬 쪽이 겸연쩍어하고, 관객은 그 실랑이 사이에 숫자를 잊는다. 그것이 관객을 다치지 않게 내보내는 가장 값싼 방법이다. 이 영화는 따지는 장면 자체를 아예 찍지 않는다. 미끼였던 숫자를 미끼인 채로 모래밭에 버려 두고 배를 띄우는데, 나는 그 배짱에 감탄하다가 조금 분해졌다.
떼먹힌 품삯이 고약해지는 것은 섬의 살림이 어디에 얹혀 있었는지를 알고 난 뒤다. 이 섬에는 노래로 풀을 자라게 하는 목청이 하나 있다. 그 목청이 풀을 키우고, 그 풀이 섬의 특산물이 되고, 그 특산물을 먹으러 바깥 사람이 배를 타고 들어온다. 요컨대 이 섬의 경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성대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이 사정을 설명 몇 마디로 끊고 지나간다. 길게 풀어 주는 대신 관객이 제 손으로 셈을 맞추게 두는 쪽을 골랐다는 뜻이다.

그 목청의 주인을 어떻게 생기게 할 것인가. 필경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결정되었어야 할 선택이다. 원작자는 머리를 일본의 옛 강아지 인형에서 가져오고, 하반신은 붉은 금붕어처럼 그렸다. 인어라는 말에서 누구나 떠올리는 비늘 미인 쪽으로는 한 발짝도 가지 않았다. 무서운 것을 만들기 위해 귀여운 것에 무서운 것을 섞은 게 아니라, 귀여운 것 하나만으로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종류의 뻔뻔함을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가장 오래 들여다본 물건은 그 쪽이 아니다. 섬에서 밥을 파는 콧수염 난 아저씨의 앞치마다. 거기에는 제 음식 맛을 자랑한다는 뜻의 글자가 큼직하게 박혀 있고, 벽에는 조갯국이라 쓴 나무판이 따로 걸려 있다. 자랑할 것이 앞치마에 한 번, 벽에 또 한 번 적혀 있는 가게다. 그런데 정작 화면에 잡힌 그는 손님을 받는 대신 의자에 앉아 제가 끓인 것을 숟가락으로 떠서 제 입에 넣고 있다. 제 음식을 제가 먹어 보는 사람은 적어도 남을 속일 작정으로 간을 하지는 않는다.
이 인물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원래는 섬의 촌장을 하나 두려 했다가 그 구상이 접히면서 대신 생긴 자리라는 것이다. 촌장이 왜 지워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지워진 덕에 이 섬에는 책임자가 없어졌다. 책임자가 없는 섬에서 떼인 품삯을 누구에게 청구할 것인가. 조력자 하나를 새로 그린 손놀림이 계약 이야기의 뼈대를 통째로 바꿔 놓은 셈이다.
섬 사람들이 한 일을 순서대로 적어 보면 이렇다. 사라진 이웃이 생기자 동굴에 사는 것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것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바다 건너로 종이를 뿌렸다. 품삯을 걸고 바깥 사람을 불러들였다. 제 손으로 하지 않고 사람을 사서 시키는 이 수순은 물론 이 섬의 발명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작고 둥근 것들이 그 수순을 한 칸도 빠뜨리지 않고 밟아 가는 것을 보는 일은 흔치 않았다.
불만은 하나다. 본편은 끝에서 비늘 한 장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남은 셈을 관객 앞으로 밀어 놓는다. 거기서 멈췄으면 아주 좋은 마무리였다. 그런데 자막이 다 오른 뒤에 한 장면이 더 붙어 있고, 거기서 영화는 제가 밀어 놓은 셈의 답을 친절하게 적어 준다. 도망친 쪽이 새로 찾은 동굴에서 기뻐하고, 화면이 바다 쪽으로 움직이면 쫓아온 것들이 이미 거기 와 있다. 관객을 너무 얕본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도 장부 자체는 깔끔하게 닫힌다. 이 영화에서 끝까지 지켜진 조항은 결국 먹을 것 하나뿐이다. 잔치에서 먹었고, 밥집에서 얻어먹었고, 떠나는 배에도 먹을 것을 싣고 떠났다. 죽지 않게 된 몸조차 무엇인가를 먹어서 그렇게 되었으니, 이 섬에서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사람을 망치는 것도 전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백 배는 거짓이었지만 음식은 단 한 번도 거짓이 아니었다. 섬은 제가 지킬 수 있는 조항만 골라서 지킨 것이다.
모름지기 초대장이란 작은 글씨를 읽지 않은 쪽이 값을 치르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품삯 대신 저녁 한 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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