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극장판 치이카와 : 인어 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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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스코트가 싫다
나는 마스코트가 싫다. 둥근 머리와 큰 눈과 아무 잘못도 없는 얼굴이 싫다. 기관 로비에 세워 둔 전신 인형은 더 싫다. 명함 귀퉁이에 작게 박아 둔 캐릭터는 참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마스코트는 같은 일을 한다. 뒤에 선 사람 대신 웃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가 보자. 지역 축제마다 세워 둔 탈인형이 싫다. 은행 창구 유리 안쪽의 손바닥만 한 인형이 싫다. 행사장 입구에서 손을 흔드는 쪽은 더 싫다. 그 손은 하루에 몇천 번을 흔든다. 흔드는 쪽이 누구인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웃음은 공짜가 아니다. 누가 웃으라고 시켰고, 웃는 쪽은 거절할 수 없다. 나는 거절할 수 없는 얼굴을 오래 싫어해 왔다. 둥근 것이 둥글어서 싫은 게 아니다. 둥근 몸을 영업에 쓰는 게 싫은 거다. (물론 잘 만든 인형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좀 놀랐다. 아흔아홉 분 동안 저 작고 둥근 것들은 한 번도 나를 향해 웃지 않는다. 카메라를 보지 않는다. 인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돈을 벌러 간다. 드디어 누군가 마스코트의 본업을 찍었다.
원작자가 각본을 직접 썼다. 감독과의 회의에 정기적으로 나왔고, 눈썹의 각도와 입을 벌리는 정도까지 주문했다고 한다. 전단지를 보는 장면에서는 손이 종이를 낚아채는 동작처럼 보이지 않게 해 달라고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캐릭터는 한 칸도 제 성격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둥근 것을 다루는 옳은 방식은 그것 하나뿐이다.
원작은 삼 년 전에 여덟 달쯤 이어진 한 편이다. 거기서 그린 섬을 그대로 들고 와 아흔아홉 분으로 늘렸다. 늘린 티는 난다. 사건이 한 번 끝나고 다음 사건이 올 때까지 화면이 잠깐씩 빈다. 그 빈 자리에 설명을 집어넣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섬으로 오라는 종이가 한 장 날아온다. 간단한 토벌 몇 번에 보수는 백 배. 섬에서만 나는 먹을거리는 거의 공짜. 일행 가운데 그 문구를 미덥지 않게 본 것은 토벌 순위 일 위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들뜬 얼굴로 배에 오른다. 제일 잘하는 쪽만 의심한다는 설정에 영화는 아무 설명도 붙이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아서 좋다.
섬은 성대하게 맞는다. 포장마차가 늘어서고 먹을거리가 넘친다. 주민들이 섬의 노래를 부른다. 색종이가 날린다. 환영 표지판 앞에 섬 사람 둘이 서 있다.
이 둘의 생김새를 오래 봤다. 머리 꼭대기에 잎사귀가 두 장 돋았고, 몸은 아래로 종처럼 퍼진다. 회색이고 눈이 점 하나다. 주인공 쪽의 둥근 선과 전혀 다른 둥근 선이다. 귀여운 것 옆에 다른 종류의 귀여운 것을 세워 둘 줄 아는 손이다. 나는 이 영화의 미술을 이 두 몸으로 판단했다.

솔직히 말하자. 이 영화는 가장 힘센 것을 다루는 데 서툴다. 섬에는 노래로 풀을 자라게 하는 것이 산다. 그것과 함께 살던 인어 셋 가운데 하나가 사라진다. 그것은 범인이 주민 가운데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주민들을 겁주기 시작한다.
가장 힘센 것에게 가장 게으른 일을 시킨 셈이다. 아무나 겁주는 걸 힘이라고 부를 수 있나? 겁박은 꽤 길게 이어진다. 그 사이에 새로 알게 되는 것은 거의 없다. 길면 그냥 긴 거다.
그 겁박에 섬이 통째로 끌려 들어간다. 주민들이 나서고, 바깥에서 온 것들이 앞장서고, 토벌 작전이 짜인다. 작전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이야기는 갑자기 바빠진다. 바빠진 만큼 얕아진다. 나는 이 영화가 작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좋아하지 않는 걸 의무감으로 찍으면 화면에 다 보인다.
귀여운 그림에 무서운 이야기를 넣으면 더 무섭다고들 한다. 아니다. 무서운 이야기가 하나 생길 뿐이다. 이 영화가 서늘한 것은 그림 때문이 아니다. 섬이 제 손으로 하기 싫은 일을 바다 건너에서 사 왔기 때문이다. 사 온 값이 백 배였다는 것도 아니고, 사 온 쪽이 끝까지 멀쩡했다는 것도 아니다. 사 올 수 있다는 걸 섬이 알고 있었다는 게 서늘한 거다.
이 영화가 둥근 것들에게 준 가장 좋은 선물은 직업이다. 저것들은 토벌로 먹고 산다. 쫓고, 치우고, 품삯을 받는다. 종이에 적힌 숫자를 보고 배에 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직업이 있는 캐릭터는 함부로 쓸 수 없다. 일하러 온 쪽에게 갑자기 꿈을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이유는 하나다. 이 영화는 둥근 것들에게 깨달음을 시키지 않는다. 섬에서 그 일을 다 겪고도 그것들은 더 나은 존재가 되지 않는다. 배운 티를 내지 않는다. 자란 티도 내지 않는다. 겪고, 돌아온다.
숲에서 길을 잃는 대목이 있다. 작은 쪽이 섬에서 밥 파는 아저씨를 만나 한 끼를 얻어먹는다. 여기서 보통은 신세 한탄이 붙는다. 고향 얘기가 나오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고 아저씨가 어깨를 두드린다. 이 영화는 그냥 먹인다. 먹이고 보낸다. 나는 그 무뚝뚝함이 고마웠다.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은 이렇다. 반성하는 마스코트. 교훈을 외는 인형. 마지막에 손을 흔드는 캐릭터. 자막 위로 떠올라 인사하는 얼굴. 머리에 리본을 달고 고개를 숙이는 둥근 것. 눈을 반짝이며 우정을 설명하는 목소리. 이 영화에는 그게 없다. 한 컷도 없다.
품위란 제 분수를 아는 일이다. (물론 분수를 모르는 쪽이 구경거리로는 낫다.) 이 영화에서 가장 품위 있는 그림은 싸움이 아니다. 셋이 머리에 풀을 엮어 쓰고 작은 나무배에 앉아 빛나는 물 위를 떠가는 장면이다. 노 하나가 뱃전에 걸쳐져 있다. 셋은 입을 벌리고 웃는다. 그 웃음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물건 하나만 더 보자. 섬으로 가는 배 위에서 작은 쪽이 뱃멀미를 한다. 섬 사람 둘이 건넨 것은 탄산음료다. 멀미약이 아니다. 이게 맞다. 멀미약은 어른의 물건이고 탄산음료는 친구의 물건이다. 그 한 병으로 셋은 단짝이 된다.
여기서 알약 한 알이 나왔다면 나는 이 영화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약을 건네는 손은 돌보는 손이다. 병을 건네는 손은 같이 노는 손이다. 이 영화는 섬 사람 둘을 처음부터 돌보는 쪽에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뒤에 오는 것이 아프다.
사라진 인어를 죽인 건 바다 건너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살리려고 한 일이었다. 인어를 죽이고, 그 고기를 끓여 먹였다. 그 한 번으로 섬 전체가 겁에 질리게 됐다.
여기서 이 영화의 배짱이 나온다. 그 일을 한 쪽도 끝까지 둥글고 귀엽다. 범인이 되었다고 눈이 작아지지 않는다. 입이 찢어지지도 않고 그림자가 지지도 않는다. 보통은 여기서 선을 한 번 날카롭게 긋는다. 이 영화는 긋지 않는다. 같은 얼굴로 끝까지 간다.
전체 관람가다. 그 등급을 달고 이걸 한다. 나는 이 뻔뻔함이 마음에 들었다. 어린 관객을 봐주지 않는 영화가 어린 관객을 가장 어른으로 대접한다. 설명해 주지 않는 것이 예의일 때가 있다.
이 캐릭터들은 밖에서 인형으로도 팔리고 문구로도 팔린다. 매대에 놓인 얼굴과 화면 안의 얼굴은 같은 선으로 그려졌다. 같은 선인데 하는 일이 다르다. 매대 위의 것은 사는 쪽을 보고 웃고, 화면 안의 것은 끝까지 제 일만 본다. 같은 얼굴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다.
귀엽다. 서늘하다. 둘은 모순이 아니다. 아흔아홉 분 내내 저 둥근 것들은 제 일을 했다. 웃어 달라는 주문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마스코트가 싫다. 제 일을 하는 둥근 것은 마스코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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