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9

더 길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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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길티

활보러· 2026. 10. 13.· 2,980자

코펜하겐 경찰 아스게르는 총기 사용 건으로 재판을 앞두고 긴급 신고 센터 야간 근무로 밀려나 있습니다. 재판은 다음 날입니다. 술 취한 남자, 강도를 당한 남자 같은 시시한 전화가 몇 통 지나간 뒤 한 여자의 전화가 옵니다. 여자는 아이한테 말하듯 조용히 말하고, 아스게르는 그 말투에서 납치를 읽어 냅니다. 흰 밴을 타고 북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낸 뒤 전화가 끊깁니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끝까지 그 센터 안을 나가지 않습니다.

구스타브 묄러의 장편 데뷔작입니다. 2018년 선댄스에서 월드 시네마 극영화 부문 관객상을 받았고, 덴마크의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출품작이었죠. 한국에는 2019년 3월에 들어왔습니다. 러닝타임 85분이고, 촬영은 13일 만에 끝났다고 합니다. 카메라 세 대로 시간 순서대로 찍었고, 전화 상대 배우들은 몇 미터 떨어진 방음실에서 실제로 전화를 걸었다더군요. 긴 테이크는 35분까지 갔다고 합니다. 감독이 유튜브에서 들은 실제 911 통화 녹음에서 출발한 기획이라는데, 20분짜리 통화만으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게 신기했다는 거죠. 매회 등장인물에 대한 인상이 바뀌는 범죄 팟캐스트의 영향도 있었다고 하는데, 보시면 이 영화가 딱 그 구조입니다. 제작비는 50만 유로였습니다. 2021년에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미국판 리메이크가 나왔습니다.

더 길티 스틸컷

전화 한 통으로 끌고 가는 스릴러는 계보가 있습니다. 공중전화 부스, 관 속, 운전석, 그리고 신고 센터. 이런 설정은 대개 두 가지 길로 빠집니다. 하나는 주인공이 결국 자리를 박차고 현장으로 뛰어나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은 지키되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화면으로 보여 주는 길이죠. 이 영화는 둘 다 안 합니다. 아스게르는 끝까지 책상을 떠나지 않고, 관객은 밴도, 집도, 다리도 보지 못합니다. 들리는 것은 목소리와 빗소리와 차 안의 소음뿐입니다. 꽤 고집스러운 선택입니다.

이 소재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였을 겁니다. 신고 센터라는 직업의 디테일을 파고들거나, 보이지 않는 사건을 관객의 상상에 맡기거나. 영화는 앞쪽을 적당히만 하고 뒤쪽에 전부를 겁니다. 직업의 디테일은 있긴 합니다. 발신 위치가 지도 모니터에 찍히고, 지역 경찰에 넘기면 저쪽은 정보가 부족하다고 돌려보내고, 아스게르는 번호를 뒤져 집으로 전화를 겁니다. 그 정도입니다. 콜센터 영화가 되려고 하지는 않아요. 아스게르는 규정대로라면 지역 경찰에 넘기고 손을 떼야 하는데, 계속 전화를 겁니다. 여자의 집에 전화해 여섯 살 딸 마틸데와 통화하고, 남편 미카엘의 전과를 조회하고, 순찰차를 집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순찰차가 집에서 발견한 것을 관객은 경찰관의 말로만 듣습니다. 피 묻은 아이, 그리고 그 아이의 동생. 이 영화에서 제일 끔찍한 장면은 화면에 없습니다. 당연히 없죠.

중간에 아스게르가 자리를 옮기는 대목이 있습니다. 동료들이 있는 방에서 나와 혼자 다른 방으로 들어갑니다. 카메라도 같이 좁아집니다. 이 영화가 공간을 바꾸는 몇 안 되는 순간이고, 그것으로 이 사람이 얼마나 혼자 다 하려는 사람인지 설명이 끝납니다. 경제적입니다.

통하는 것은 소리의 쓰임새입니다. 아스게르가 여자에게 미카엘을 뭐든 손에 잡히는 걸로 내리치고 도망치라고 지시하고 나서 상황이 뒤집히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여자가 아들 올리버의 배 속에 뱀이 있어서 그걸 꺼내 줬다고 말합니다. 음악이 깔리지 않습니다. 설명도 없습니다. 통화가 끊기고 아스게르의 얼굴만 남죠. 미카엘은 납치범이 아니라 아내를 정신병원에 다시 데려가던 남편이었고, 왜 경찰을 부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제도를 믿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이 반전은 대사 한 줄에 기대고 있고, 그 한 줄이 버팁니다.

더 길티 포스터

걸리는 것은 그 뒤입니다. 아스게르는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여자에게 자기가 열아홉 살짜리를 쏘아 죽였고 그것은 정당방위가 아니었다고 털어놓습니다. 동료들이 그걸 듣고, 그는 파트너 라시드에게 다음 날 법정에서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고, 전화 한 통을 더 걸고, 센터를 나갑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사람이 둘이라는 걸 영화가 자로 재서 보여 주는 셈인데, 마지막 십여 분은 앞의 한 시간보다 설명이 친절합니다. 반전 이후에 남는 생각이 별로 없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반은 맞습니다. 여자가 납치가 아니라 발작이었다는 걸 알고 나면 앞의 긴장이 소급해서 좀 싱거워지긴 해요.

배우 이야기를 해야죠. 야코브 세데르그렌은 85분 동안 앉아서 헤드셋을 끼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처음에 멀리서 얕은 초점으로 잡다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그가 방을 옮기면 같이 옮깁니다. 얼굴과 상반신이 전부인 영화에서 그는 듣는 연기를 합니다. 말하는 장면보다 듣는 장면이 많고, 그게 더 어렵죠. 덴마크의 로베르트상과 보딜상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나머지 배우들은 목소리로만 나오는데, 이벤 역의 제시카 디니지는 얼굴 없이 한 사람의 상태 변화를 전부 전달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물 구성을 세어 보면 이름이 있는 인물이 아홉인데 그중 일곱은 목소리뿐입니다. 이름 있는 여자 인물은 셋인데 전부 목소리로만 나옵니다. 얼굴이 나오는 사람은 아스게르와 같은 방 동료 몇뿐이죠. 설정상 그럴 수밖에 없긴 한데, 화면에 있는 사람이 거의 다 경찰이라는 건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 시점이 틀리는 이야기니까 맞아떨어지긴 합니다.

결말을 알고 다시 보면 앞부분의 전화들이 다르게 들립니다. 여자가 아이한테 말하듯 말한 이유도, 미카엘이 경찰을 부르지 않은 이유도요. 그런 영화는 두 번째가 더 나쁘지 않습니다. 소리만으로 85분을 버티고, 보여 주지 않은 걸로 제일 센 장면을 만들고, 반전 뒤에 조금 흔들립니다. 그 정도면 됐죠.

(덧) 한국 포스터에는 'a.k.a 개봉미정'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습니다. 극장 체인이 개봉 촉구 캠페인을 벌여 개봉을 끌어냈다는 걸 마케팅으로 쓴 거죠. 영화 안에서 아스게르가 규정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걸 생각하면 묘하게 어울립니다.

(덧) 리메이크판은 폭우 대신 산불을 깔고, 아들을 살려 놓고, 주인공을 더 처절하게 보냅니다. 세 가지 다 원작이 안 한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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