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9
더 길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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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받지 않으면 대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택배는 문 앞에 놓이고, 보험은 가입되지 않고, 설문은 응답되지 않고, 당첨은 취소된다. 가끔 중요한 전화였음이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고, 늦은 것은 편리하다. 받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결정이다. 작고 비루한 결정이다.
그런 내게 받는 것이 직업인 사람의 영화가 왔다. 코펜하겐 긴급 신고 센터의 야간 근무자 이야기다. 뼈대를 한 문장으로 잡으면 이렇다. 끊어야 할 전화를 끊지 않은 남자가, 끊지 않았기 때문에 틀리고, 끊지 않았기 때문에 한 가지를 건지는 영화다. 재판을 앞둔 경찰이 책상으로 밀려나 헤드셋을 쓰고 있다. 재판은 내일 아침이다. 책상 위에는 물에 녹는 알약 한 알이 있다. 그는 그것이 녹는 것을 보고 있다.
약을 먹고 전화한 남자에게 그는 묻는다. 그건 네 잘못 아니냐고. 홍등가에서 물건을 털린 남자에게는 순찰차를 보내 준다. 천천히 보내 준다. 세 번째 전화에서 여자가 아이에게 말하듯 말한다. 그는 그 말투에서 납치를 읽고, 예와 아니오로만 답하게 하고, 흰 승합차와 북쪽이라는 방향을 얻어낸다. 전화가 끊긴다. 지역 경찰에 넘긴다. 넘기고 손을 떼는 것이 규정이다. 그는 손을 떼지 않는다. 여자의 집에 전화하고, 여섯 살 아이와 통화하고, 교대 시간이 지나도 자리를 지키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두 번째 전화를 오래 생각했다. 차 안에서 여자에게 물건을 털린 남자. 그는 발신 위치가 홍등가라는 것을 화면에서 확인하고, 사정을 짐작하고, 순찰차를 보내되 서둘러 보내지 않는다. 남자는 도움을 받는다. 다만 조금 늦게 받는다. 이 몇 분의 지연은 누구의 것인가. 규정의 것도, 전산망의 것도 아니다. 수화기를 쥔 사람의 것이다. 긴급 신고 센터는 회전초밥집과 닮았다. 접시는 끊임없이 돌아오고, 앉은 사람은 집을 것과 보낼 것을 고른다. 다른 점은 접시 쪽에서 사람이 운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는다는 것은 판단한다는 뜻이다. 판단한다는 것은 순서를 정한다는 뜻이다. 순서를 정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게 한다는 뜻이다.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보통 권력자라고 부른다. 그 권력은 책상 하나와 헤드셋 하나의 크기다. 크기가 작다고 권력이 아닌 것은 아니다. 작은 권력은 오히려 자주 쓰인다. 하루에 몇십 번씩.
그 권력이 가장 크게 쓰이는 장면은 소리치는 장면이다. 그는 여섯 살 아이에게 동생 옆에 앉아 있으라고 말한다. 아이는 앉는다. 순찰차가 그 집에서 본 것을 그는 전화로 듣는다. 아이의 몸에 피가 묻어 있다. 상처는 없다. 아기는 죽어 있다. 그는 남편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너 같은 자는 처형당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책상 앞에 앉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그것이다. 소리치기. 그리고 끊기. 끊고 나면 책상은 그대로고, 알약은 다 녹았고, 승합차는 여전히 북쪽으로 가고 있다.
한국 포스터의 문구는 이렇다. 지금부터 모든 소리는 이 사건의 단서가 된다. 맞는 말이다. 다만 단서는 언제나 어떤 사건의 단서다. 사건을 먼저 정하면 소리는 성실하게 그 사건을 입증한다. 그는 남편에게 전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 순간 사건은 납치가 된다. 이후의 모든 소리, 빗소리, 차창 닦는 소리, 여자의 숨소리는 납치의 단서가 된다. 소리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사건이 먼저 정해졌을 뿐이다. 그는 여자에게 남편의 머리를 치라고 지시한다. 여자는 친다. 그리고 여자의 입에서 아기에 관한 말이 나온다. 납치라는 사건이 그 한마디로 무너진다. 남편은 범인이 아니라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가던 사람이었다.

이 영화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영화가 아니라, 상상한 것을 집행하는 영화다. 상상만 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상상을 전화로 보냈고, 전화는 어느 승합차 안에서 한 사람의 머리를 쳤다. 감독은 각본을 쓰기 전에 실제 신고 센터의 야간 근무를 여러 번 지켜보았다고 한다. 영화는 그 방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면 같이 들어간다. 그 방의 불이 나가면 같이 어두워진다. 책상 위의 작은 붉은 등만 남는다. 한국어 자막은 815개였다고 한다. 보통 영화의 절반이 조금 넘는다. 말이 전부인 영화인데 말은 적다. 나머지는 듣는 얼굴이다.
그러나 그가 전화를 끊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규정대로 지역 경찰에 넘기고,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고, 교대 시간에 퇴근했다면. 남편은 아내를 병원에 데려갔을 것이고, 아기는 이미 그 전에 죽어 있었고, 딸아이는 피 묻은 채 발견되었을 것이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 남편이 머리를 맞지 않은 만큼 더 나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밤은 전부 소음이었나. 여기서 나는 한 번 멈춘다. 끊지 않은 전화의 성과는 사건 해결이 아니다. 성과는 하나다. 다리 위에 선 여자에게 걸 번호가 하나 있었다는 것.
여자는 다리 위에서 그에게 전화한다. 그는 여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한다. 열아홉 살을 쏘았고, 정당방위가 아니었다고. 동료들이 듣는 앞에서 한다. 이 고백이 여자를 다리에서 내려오게 했는지 영화는 확언하지 않는다. 전화는 끊기고, 몇 분 뒤 지역 경찰이 여자를 데리고 있다고 알려 온다. 그는 일어나 걸어 나간다. 나가기 전에 전화를 한 통 더 건다. 누구에게인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이번에는 그가 거는 쪽이다. 밤새 받던 사람이 마지막에 건다. 받는 것은 판단이고, 거는 것은 자백이다.
전화를 받는 자리는 어디에나 있다. 민원 창구, 상담 센터, 당직실, 병원 접수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하루에 몇십 번씩 순서를 정한다. 누구를 먼저, 누구를 천천히. 그들을 권력자라고 부르면 당사자들은 웃을 것이다. 월급 명세서를 보여 주며. 그들의 말도 맞다. 권력은 월급과 무관하게 분배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어느 쪽 편을 들 생각은 없다. 다만 다음에 상담원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면, 그 잠시가 판단의 시간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여전히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안다. 받지 않는 것도 예와 아니오 중 하나를 고른 것이다. 전화 저편에서 누군가 아이에게 말하듯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받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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