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9
더 길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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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보호해줄 거야’
누군가를 구했다는 말은 대개 구한 사람의 말이다. 구조된 사람은 그 문장에서 목적어로만 남는다. 목적어는 말하지 않는다. 말해지는 쪽이다.
덴마크 영화 〈더 길티〉는 코펜하겐 긴급 신고 센터의 야간 근무자 아스게르가 한 여자의 전화를 받는 85분이다. 그는 총격 사건으로 재판을 앞둔 경찰이고, 전화를 건 여자 이벤은 아이에게 말하듯 말한다. 그는 납치를 알아채고 규정을 넘어 사건에 뛰어든다. 흔한 해석은 이렇다. 편견에 갇힌 경찰이 타인의 비극을 통해 자기 죄를 직면하고 고백하는 속죄의 드라마. 소리만으로 긴장을 만든 데뷔작. 한국 포스터는 거기에 한 줄을 보탠다. 2019년 반드시 개봉시켜야 할 데뷔작. 극장 체인의 개봉 촉구 운동이 그 문장을 만들었고, 포스터에는 개봉미정이라는 별명까지 박혀 있다.

나는 다르게 보았다.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속죄 이야기가 아니라, 한 여자의 밤이 한 남자의 속죄에 쓰이는 이야기다. 이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목소리로만 있다. 그 목소리는 처음에 피해자였다가, 중간에 가해자가 되었다가, 마지막에 다리 위에 선다. 세 이름 모두 아스게르의 판단이 붙인 것이다. 그가 '납치'라고 부르면 납치였고, 그가 범인이라 부르면 남편이 범인이었다. 여자는 한 번도 자기 상태를 자기 말로 이름 붙이지 못한다. 그럴 자리가 영화에 없다.
그가 전화를 받는 자리에 앉아 있으므로 질문은 그의 것이고, 질문이 그의 것이므로 여자는 예와 아니오로만 답하고, 예와 아니오로만 답하므로 여자의 상태는 납치로 번역되고, 납치로 번역되므로 전과가 있는 남편은 범인이 되고, 남편이 범인이므로 여자는 남편의 머리를 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 연쇄에서 여자가 결정한 것은 없다. 영화는 이것을 한 남자의 오판으로 보여 준다. 나는 오판이 아니라 배치라고 생각한다. 묻는 자리와 답하는 자리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오판은 그 배치가 낳은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누가 말하고 누가 듣기만 하는가. 그는 묻고, 지시하고, 소리치고, 마지막에는 고백한다. 여자는 답하고, 시키는 대로 치고, 운다. 영화는 그의 듣는 얼굴을 85분 동안 보여 준다. 그 얼굴이 듣고 있는 것은 여자의 말이 아니라 자기가 세운 사건의 진행이다. 여자의 말이 그 사건에 맞지 않게 되는 순간에야 그는 처음으로 듣는다. 그때는 이미 한 사람이 머리를 맞은 뒤다.

예고편에서 그는 말한다. 경찰이 보호해줄 거야. 나는 이 문장의 '보호'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이 영화에서 경찰이 한 보호는 무엇이었나. 흰 승합차 한 대를 세워 아무것도 찾지 못한 것, 여섯 살 아이가 피 묻은 채 있는 집에 뒤늦게 도착한 것,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가던 남편이 머리를 맞게 한 것. 그리고 마지막에 다리 위의 여자를 데리고 있다고 보고한 것. 보호는 여자가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약속한 것이다. 약속한 사람은 약속을 지켰다고 느끼고 걸어 나간다. (그는 재판 전날 밤에도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것이 그가 받은 징계였다.)
약속을 받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여섯 살 딸이다. 그는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를 집으로 보내 주겠다고 말하고, 동생 옆에 앉아 있으라고 말한다. 아이는 앉는다. 순찰차가 도착해 본 것은 피가 묻은 아이와 죽은 아기다. 그 뒤로 영화는 아이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아이가 들은 약속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보호를 약속받은 사람은 둘인데, 영화가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은 약속한 쪽 하나다. 나는 이 영화의 시점이 그 자리에서 결정되었다고 생각한다.
관객도 그와 함께 오판한다는 평이 많다. 맞는 말이다. 다만 그것은 관객이 그와 같은 자리에 앉혀졌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화기 이쪽에만 카메라를 둔다. 여자의 차 안, 아이가 앉아 있는 방, 남편이 서 있는 길에는 카메라가 없다. 관객이 오판한 것은 관객의 편견 때문이 아니라 배정된 자리 때문이다. 자리를 바꿔 주지 않는 영화가 관객의 편견을 깨닫게 했다고 말하는 것은, 내게는 순서가 뒤바뀐 말로 들린다.
시놉시스는 그가 '직감적으로' 납치를 알아챘다고 쓴다. 직감은 좋은 말이다. 경험의 다른 이름이고, 경험은 경찰의 자산으로 통한다. 문제는 그 직감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다. 전과가 있는 남편, 겁에 질려 아이에게 말하듯 말하는 여자, 북쪽으로 가는 흰 승합차. 이 세 조각은 그가 듣기 전부터 하나의 이야기로 조립되어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해치고 경찰이 여자를 구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너무 익숙해서 직감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반전은 그 이야기가 틀렸다고 말한다. 나는 거기까지는 동의한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그다음이다. 틀린 이야기를 대신한 것이 무엇인가. 정신병원에 있었던 어머니가 자기 아기를 죽였다는 이야기다. 영화는 이 사실을 가장 늦게, 가장 큰 충격으로 꺼낸다. 여자의 병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치다. 남자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여자의 병이 쓰이고, 남자의 고백을 끌어내기 위해 여자가 다리 위에 선다. 여자는 '다시' 갇히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 '다시'에는 이 밤 이전의 시간이 전부 들어 있다. 영화가 그 말에 준 답은 경찰이다. 그가 자기 죄를 고백하는 동안 여자는 경찰에게 넘겨지고, 그는 잘했다는 말을 듣고 복도를 걸어 나간다. 영화가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는 사람은 그 한 명이다. 여자가 어디로 가는지는 다시 병원이라는 것 말고 아무도 묻지 않는다.
남편도 있다. 그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아내를 직접 병원에 데려가던 사람이다. 영화는 그에게 이유를 한 줄 말하게 한다. 나는 그 한 줄보다 그가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더 많은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이 가족에게 경찰은 한 번도 보호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밤에 보호를 자처한 사람은 하필 재판을 앞둔 경찰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이 어긋남을 안다는 점이다. 그에게 죄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을 보면 안다. 문제는 영화가 그 죄를 고백의 재료로만 쓰고, 보호받지 못한 쪽의 자리는 끝까지 비워 둔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속죄의 드라마로 소개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속죄는 그의 것이고, 밤은 여자의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보호받은 사람은 없다. 고백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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