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7
나쁜 대통령: 기름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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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앞에서 작은 것부터 찾는 얼굴
혹시 3분짜리 영화를 보고 아는 사람 얼굴이 떠오른 적 있으세요? 저는 있어요. 그것도 백악관 집무실에서요. 기름이 바다에 쏟아지는 날 대통령이 전날 술에서 덜 깬 채로 담화를 앞두고 있는데, 저는 그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이 글은 그날 이야기와 그 장면 이야기를 번갈아 쓸게요.
그날
작년 가을이었어요. 오래된 친구들끼리 1박 2일로 산 밑 민박집에 갔는데, 새벽에 보일러가 터졌어요. 방바닥이 축축해지고 복도에 물이 흐르는데 총무를 맡은 친구가 그날따라 제일 늦게 일어났어요. 전날 밤에 제일 늦게까지 마신 사람이기도 했고요. 저희가 수건으로 물을 막으면서 그 친구를 깨웠더니, 눈도 다 못 뜨고 처음 한 말이 이거였어요. 「라면 냄비 어디 있어?」
그 장면
이 단편은 러닝타임이 3분이에요. 집무실 하나, 대통령 하나, 참모 몇 사람. 대형 기름 유출이 터졌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담화를 해야 하는 자리인데, 이 대통령은 그런 데 관심이 조금도 없어요. 숙취 상태로 앉아서 참모들에게 센트럴파크를 왜 못 샀느냐고 따지고, 전용기에 놓을 물미끄럼틀 이야기를 꺼내요. 첫 장면부터 벗은 몸으로 열고요. 제가 본 글들 중에는 그 첫 장면이 너무 쉬운 길이라고 식은 글도 있었고, 3분 안에 시작과 중간과 끝을 다 밀어 넣은 속도가 좋다는 글도 있었어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첫 장면에서는 웃지 못했어요. 웃은 건 센트럴파크부터였어요. 바다가 기름으로 덮이는 날 공원을 못 샀다고 화내는 사람. 그 얼굴이 어디서 봤더라 싶었어요.
그날
라면 냄비요. 복도에 물이 흐르는데요. 저희는 화를 내야 하는데 웃음부터 터졌어요. 그 친구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에요. 큰일이 눈앞에 있을 때 사람이 작은 것부터 찾는 건, 큰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을 때 하는 행동이더라고요. 그 친구는 민박집 주인한테 전화하는 것도, 보일러 밸브를 잠그는 것도 무서웠던 거예요. 라면 냄비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였고요. (그 뒤로 저희 모임에서 「냄비」는 도망친다는 뜻이 됐어요. 「너 지금 냄비냐」 하면 다들 알아들어요.)
그 장면
그날 이후로 이 대통령이 다르게 보였어요. 처음 봤을 때는 먼 나라 풍자였어요. 본 사람들 글마다 현실 정치 얘기가 따라 나오고, 백악관 다큐멘터리라고 부른 글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친구 얼굴을 대고 보니 이 사람은 권력자가 아니라 그냥 책임을 맡은 사람이에요. 감당이 안 되는 크기의 일이 책상 위에 올라왔고, 그래서 공원이랑 미끄럼틀이라는 자기 크기의 물건으로 도망가는 사람. 센트럴파크는 라면 냄비예요. 크기만 다르지 하는 짓은 같아요. 이 단편이 끝까지 이 사람을 벌하지도 않고 담화가 잘 됐는지도 알려 주지 않는 건, 저한테는 냄비를 찾던 친구가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영화가 굳이 안 보여 주는 것과 같았어요. 안 보여 줘도 알아요. 그날도 결국 물은 저희가 다 막았거든요.
그날, 그리고 그 장면
여기서 한 번 정색할게요. 이 단편은 2015년 가을에 찍어서 2020년 늦가을에야 공개됐어요. 5년이에요. 그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서 이 농담이 풍자처럼 보이게 됐다는 글이 많은데, 저는 그 읽기가 조금 아까워요. 그렇게 읽으면 이 대통령은 「저쪽 사람」이 되고, 저희는 안전한 자리에서 웃게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저쪽 사람 얼굴에서 제 친구를 봤고, 그 친구 얼굴에서 제 얼굴도 봤어요. 저도 밀린 집안일 앞에서 괜히 연필부터 깎은 적이 있거든요. 큰일 앞에서 작은 것부터 찾는 건 대통령만 하는 짓이 아니에요. 다만 대통령이 하면 바다가 기름으로 덮이고, 제가 하면 집안일이 한 시간 늦어질 뿐이에요.
3분이라 다행이에요. 더 길었으면 저는 이 사람을 미워했을 거예요. 3분이라서 미워할 틈이 없이 끝났고, 대신 아는 얼굴 하나가 남았어요.
그 친구는 그날 아침에 결국 라면을 끓였어요. 물 막느라 지친 저희한테 한 그릇씩 돌렸고요. 냄비를 찾던 사람이 냄비로 갚은 셈이에요. 이 대통령한테도 그런 아침이 왔으면 좋겠어요. 집무실에서 라면은 못 끓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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