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0
타이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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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눈으로 죽는다
백 분 남짓한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가 아흔 분쯤 지나서야 나온다. 「크라켄을 풀어라.」 예고편이 이 한마디로 영화를 팔았고, 어떤 관객은 그 말을 듣기까지 한 시간 반을 기다렸다고 적어 두었다. 나는 그 기다림을 사기라고 부르는 쪽에 서지 않겠다. 다만 이 영화가 어떤 약속을 했고, 무엇을 지켰으며, 무엇을 어겼는지는 또박또박 세어 볼 참이다. 《타이탄》은 괴수 모험극이다. 모험극은 약속이 많은 장르다.
약속
괴수 모험극이 관객과 맺는 약속은 셋으로 줄일 수 있다. 첫째, 괴물을 보여 준다. 크기와 질감을 아끼지 않고, 오래. 둘째, 사람이 그 괴물과 몸으로 싸운다. 신이 번개 한 번으로 치워 버리면 약속 위반이다. 셋째, 끝에 영웅은 보상을 받는다. 도시든 왕좌든 공주든. 1981년 영화를 다시 만든 이 작품은 거기에 약속 하나를 더 얹었다. 예고편의 그 한마디다. 풀어 놓겠다고 했으니, 풀린 것이 무엇을 하는지 보여 줘야 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세 번째 약속을 가장 유치한 약속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아낀다. 영웅이 공주를 얻는 결말은 백 년 동안 욕을 먹었다. 그래도 그 결말이 있어야 괴물의 크기가 의미를 가진다. 괴물은 보상의 크기를 재는 자다.
이행
지킨 것부터 적는다. 이 영화의 괴물들이 전부 눈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눈치채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스틱스의 마녀 셋은 눈 하나를 돌려 쓴다. 그 눈 앞에서 메두사의 머리라는 답이 나온다. 메두사는 눈이 마주친 자를 돌로 만든다. 그래서 신전 안의 싸움은 베는 싸움이 아니라 보지 않는 싸움이 된다. 용암 위의 난간을 따라 뱀처럼 빠르고 조용히 미끄러져 오는 메두사를, 사내들은 등을 돌린 채 상대해야 한다. 고개를 돌리는 쪽이 진다. 액션 영화에서 보지 말라는 것이 규칙이 되는 순간은 흔치 않다. 괴물을 보여 주겠다는 약속과 괴물을 보면 죽는다는 규칙을 한 장면에 포개 놓은 것인데, 이걸 어떻게 만들었나 싶어 나는 두 번 감탄했다.
두 번째로 지킨 것은 속도다. 날개 달린 검은 말을 타고 아르고스 상공을 가르며 하데스의 날개 달린 것들과 크라켄의 촉수를 피해 나는 대목은, 이 영화를 싫어한 평자조차 다른 모든 효과를 압도한다고 적었다. 괴물의 크기를 사람의 속도로 재게 하는 것. 둘째 약속은 적어도 하늘에서는 지켜졌다.
배반
이제 어긴 것. 크라켄은 늦게 온다. 그리고 와서는 싸우지 않는다. 일식과 함께 바다에서 솟아 도시를 부수고 제물로 내걸린 공주 앞까지 다가오는 데는 시간을 쓰지만, 영웅과 크라켄 사이에 칼이 오가는 순간은 없다. 메두사의 머리가 들리고, 크라켄의 눈이 그것을 본다. 그걸로 끝이다. 돌이 된 몸이 부서져 바다로 떨어진다. 둘째 약속, 몸으로 싸운다는 약속은 땅에서 깨진다. 셋째 약속도 깨진다. 공주가 왕좌를 내밀지만 그는 받지 않고, 아버지가 올림포스를 내밀어도 받지 않는다. 보상의 크기를 재는 자였던 괴물이, 잰 보상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채 끝난다.
다만 이 배반에는 뒷문이 하나 있다. 길 위에서 영웅을 안내하던 이오가 신전 밖에서 죽고, 영웅이 모든 보상을 거절한 뒤에 아버지 신이 그 여자를 살려 돌려보낸다. 거절한 자에게 신이 몰래 상을 쥐여 주는 꼴이다. 셋째 약속을 어긴 척하면서 반쯤 지킨 셈인데, 나는 이 뒷문이 영화에서 가장 솔직하지 못한 대목이라고 본다. 어길 거면 끝까지 어겼어야 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약속을 어긴 영화다. 그런데 나는 이 배반이 더 좋았다고 적으려 한다. 이유는 앞에 썼다. 이 영화의 괴물들은 눈으로 움직인다. 눈을 돌려 쓰는 마녀, 눈이 마주치면 죽이는 메두사. 그런 세계에서 가장 큰 괴물이 눈으로 죽는 것은 배반이 아니라 규칙의 완성이다. 크라켄은 무기이기 전에 구경거리로 만들어진 괴물이다. 열흘의 시한, 일식, 내걸린 공주, 모여든 군중. 전부 보게 하려는 장치다. 일식마저 하늘이 눈을 감는 순간이라고 읽으면 지나친 풀이겠지만, 그렇게 읽고 싶어지는 영화다. 보라고 만든 괴물이 보는 것 때문에 죽는다. 칼로 죽였다면 그 장면은 앞선 아흔 분과 아무 상관없는 장면이 됐을 것이다.
만든 사람들의 손을 상상해 본다. 상상이다. 편집실에서 누군가 크라켄의 분량을 놓고 다퉜을 것이다. 더 보여 주자는 쪽과, 보여 주는 순간 끝내자는 쪽. 끝내자는 쪽이 이겼고, 그 사람은 아마 욕을 먹었다. 나라면 그 자리에서 더 보여 주자는 쪽에 손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결말을 만들 수 없었던 사람이고, 못 만든 것을 변호하는 사람의 말에는 질투가 조금 섞인다.
한계는 인정한다. 영웅은 늦게 도착한다. 도시의 반이 부서진 뒤에야 날아오는 영웅에게 박수를 치기는 어렵고, 그 점을 두고 아르고스 사람들이 크라켄의 간식이 되어도 쌌다고 비꼰 평도 있었다. 그리고 눈으로 끝내는 결말이 아무리 규칙에 맞더라도, 기다린 시간에 비해 짧다는 느낌은 규칙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모름지기 약속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어기는 쪽이 더 정직할 때가 있다. 이 영화는 구경거리를 약속했고, 구경이 곧 죽음인 세계를 만들었고, 그 세계의 법대로 괴물을 치웠다. 아흔 분을 기다리게 한 것은 미안한 일이다. 다만 기다린 끝에 나온 것이 칼싸움이 아니라 눈 맞춤이었다는 사실만은, 나는 끝까지 편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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