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974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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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못 끊는 전화를 네가 끊어 줘
친구가 나 대신 전화를 걸어 준 적 있어요? 내가 못 끊는 걸 내 말투까지 흉내 내며 끊어 준 적. 있다면 이 영화 보면서 그 친구 생각이 날 거예요. 없다면 세 시간 보고 나서 그런 친구 한 명 갖고 싶어질 거고요.
영화 이야기부터 할게요. 1974년 파리. 도서관 사서 줄리가 공원 벤치에서 마법 책을 읽고 있는데, 카바레 마술사 셀린느가 급히 지나가면서 스카프를 날리고 가방에서 인형을 떨어뜨려요. 줄리는 주워 주려고 쫓아가고, 셀린느는 쫓긴다고 생각하고 더 달아나요. 몽마르트르 계단을 그렇게 뛰어 올라가요. 이게 시작이고, 얼마 안 가 셀린느는 줄리 집에 들어와 살아요. 줄리가 블러디 메리를 만들어 주는 장면이 있는데 저는 거기서 이미 좋았어요. 처음 본 사람한테 술을 만들어 주는 사람, 처음 본 사람 집에서 그걸 받아 마시는 사람. 둘 다 저는 못 하거든요.
줄리는 내성적인 사람이고 셀린느는 무대에서 사람을 속이는 게 직업인 사람이에요. 한 사람은 벤치에서 마법 책을 읽고, 한 사람은 카바레 무대에서 마법을 해요. 책으로 배우는 마법과 손으로 하는 마법이 한방에 들어온 거예요. 영화는 이 둘을 설명하지 않고 그냥 몰아넣어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 세 시간 넘게 담쟁이 덮인 저택이랑 사탕이랑 그 안에서 되풀이되는 이상한 집안 이야기를 다루는데, 그건 다른 분들이 더 잘 쓰실 거예요. 저는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두 장면만 붙들고 갈게요. 두 사람이 서로가 되는 장면이요.
첫 번째. 줄리에게는 어릴 적 연인 길루가 있어요. 공원 정자에서 만나기로 한 날, 줄리 대신 셀린느가 가요. 가발을 쓰고요. 그리고 그 남자랑 춤을 추고, 약혼까지 하고, 그 자리에서 끝장을 내요. 장미 덤불 얘기를 섞어서 여기 옮기기 좀 그런 말까지 던지고요. 줄리가 몇 년을 못 한 일을 셀린느가 가발 하나 쓰고 한 번에 해치워요.
두 번째. 셀린느에게 오디션 전화가 와요. 카바레 쪽 후원자들 앞에서 마술을 보여 줘야 하는데, 그 전화를 줄리가 받아요. 그리고 줄리가 가요. 셀린느가 하던 마술이랑 전혀 다른 걸, 완전히 즉흥으로, 그 사람들의 어리둥절한 얼굴 앞에서 벌여요. 셀린느가 서야 했던 자리를 줄리가 가서 뒤집어 놓고 와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두 장면을 처음엔 장난으로 봤어요. 둘이 깔깔대면서 노는 거. 근데 중간쯤부터 이상하게 목이 막혔어요. (여기서 제 얘기 잠깐. 스물몇 살 때 저한테 끊어야 하는데 못 끊는 게 하나 있었어요. 뭐였는지는 넘어가고요. 상대가 전화를 하면 저는 받고, 받으면 또 알겠다고 했어요. 그걸 몇 달 보던 친구가 어느 날 제 폰을 가져가더니 제 말투로, 제 이름으로 통화를 하고 끊었어요. 끝났어, 하고 폰을 돌려줬어요. 저는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울었어요. 왜 울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셀린느가 가발을 쓰는 걸 보면서 그 친구 얼굴이 겹쳤어요. 그러니까 그 장면은 장난이 아니라 그거였어요. 네가 못 하는 걸 내가 네가 돼서 해 줄게. 내가 못 하는 걸 네가 나 돼서 해 줘.
사탕 얘기를 여기서 하나만 할게요. 두 사람은 저택에서 밀려 나올 때마다 입에 사탕이 하나 물려 있고, 그걸 녹여 먹으면 안에서 본 게 조금씩 돌아와요. 먹을 때마다 더 많이 돌아오고요. 둘은 줄리 방에 앉아 사탕을 번갈아 물고 그 집 이야기를 맞춰 가면서 깔깔대요. 저도 그날 밤 그 친구랑 그 통화를 열 번쯤 다시 말했어요. 네가 그때 뭐라고 했지, 아니 그 다음에. 말할 때마다 조금씩 더 웃겼어요. 둘이 같이 겪은 일은 둘이 같이 되풀이해 말해야 완성되나 봐요. 사탕이 그거였어요.
그 사연이 두 장면을 다르게 보이게 한 지점이 있어요.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가 되는 걸 아주 가볍게 찍어요. 비장한 음악도 없고 결심하는 얼굴도 없어요. 그래서 처음엔 가벼운 줄 알았는데, 가벼운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어요. 친구 사이에서 누가 누구를 대신하는 일이 비장할 이유가 없잖아요. 제 친구도 제 폰을 돌려주면서 영화 볼래, 하고 물었어요. 그게 다였어요.
그리고 하나 더. 길루 장면에서 셀린느는 줄리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줄리는 평생 못 할 말을 해요. 오디션 장면에서 줄리는 셀린느의 마술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 식으로 다 바꿔 버려요. 대신한다는 게 똑같이 한다는 게 아니었어요. 내가 되어 주되 나보다 멀리 가는 거. 제 친구도 제 말투로 통화했지만 제가 평생 못 했을 말을 했어요. 그래서 끊어졌어요. 똑같이 했으면 안 끊어졌을 거예요.
참, 이 영화 각본에 감독이랑 같이 두 주연 배우 이름이 올라 있대요. 다른 두 배우도요. 그래서 그런가, 둘이 서로가 되는 장면이 연기 같지 않고 진짜 둘이 노는 것처럼 보여요. 상영시간이 3시간 13분인데 저는 그 두 장면 덕에 길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중간에 저택 장면이 되풀이될 때 잠깐 졸 뻔한 건 비밀이고요.
저택 이야기는 짧게만요. 두 사람은 그 집에 한 명씩 들어갔다가 사탕 하나 물고 밀려 나와요. 사탕을 녹여 먹으면 안에서 본 게 조금씩 떠오르고요. 안에서는 홀아비와 그를 두고 다투는 두 여자와 어린 딸 마들린의 이야기가 같은 순서로 되풀이되고, 아이는 매번 죽어요. 혼자 들어갈 땐 아무것도 못 바꾸던 걸 둘이 같이 들어가서 바꿔요. 마들린을 데리고 나오죠. 저는 이것도 결국 같은 얘기라고 봐요. 혼자서 못 끊는 전화를 둘이면 끊어요.
마지막엔 셀린느랑 줄리랑 마들린이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요. 고양이도 있어요. 옆으로 저택 어른들이 탄 배가 굳은 얼굴로 지나가요. 그리고 영화는 처음 그 벤치로 돌아가는데, 이번엔 셀린느가 앉아 있고 줄리가 뛰어 지나가면서 책을 떨어뜨려요. 둘이 같은 윗옷을 입고요. 저는 이 마지막에서 좀 웃었어요 ㅋㅋ 아, 이제 반대로 한 번 더 하겠구나. 이번엔 줄리가 셀린느 대신 뭘 해 주겠구나.
여러분 곁에 그런 사람 있으면 오늘 한 번 연락해요. 없으면 여러분이 누구한테 그런 사람이 돼 봐요. 가발은 없어도 돼요.
추신. 그 친구는 지금도 제 전화를 가끔 대신 받아요. 이제는 끊어야 하는 전화가 아니라 그냥 제가 받기 귀찮은 전화요. 그것도 괜찜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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