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살목지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저수지 관리 주체에 드리는 민원 다섯 건
먼저 묻겠다. 주말에 상사한테서 전화가 와서, 지도 서비스 화면에 이상한 것이 찍혔으니 오늘 안으로 저수지에 가서 다시 찍어 올리라는 지시를 받으신 분들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나는 전화기를 뒤집어 놓고 자는 쪽이다. 그런데 「살목지」의 수인 PD는 간다. 간다는 것까지는 좋다. 공포영화는 누군가 가야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만 가는 길에 쌓이는 것이 공포만이 아니라 민원도 함께였던 것이다.
이 영화는 로드뷰 서비스 회사 온로드미디어의 촬영팀이 충남의 한 저수지로 가는 이야기다. 재촬영을 맡은 PD 수인, 로드뷰 촬영 업체를 꾸리는 경태·경준 형제, 막내 성빈, 공포 채널을 하는 세정, 그리고 병가 중이라던 선배 교식이 어느새 물가에 서 있다. 뒤늦게 전 남자친구 기태가 합류한다. 아래는 관람객 한 사람으로서 저수지 관리 주체에 접수하는 민원이며, 접수 번호는 없다.
민원 1. 출입문 설계 오류 — 상사
장면은 회사 사무실이다. 부장이 저수지 로드뷰에 정체불명의 형체가 찍혀 주민 항의가 들어왔다며, 주말인데도 당일 안에 새로 찍어 올리라고 한다. 공포영화에서 가장 믿을 만한 괴물은 귀신이 아니라 결재 라인이라 하겠다. 귀신이 아무리 저수지에서 기다려도 사람이 안 오면 할 일이 없는데, 이 영화는 그 운송 업무를 부장님께 맡겼다. 시정 요청. 다음 작품에서는 부장님께 연차를 드리고, 인물들이 제 발로 가게 해 주시기 바란다. 그편이 더 무섭다.
민원 2. 안내 표지 미비 — 위치 정보
장면은 저수지로 가는 차 안이다. 위치 신호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공포영화의 차는 반드시 길을 잃어야 한다는 조례가 어디 있는 모양이다. 저수지 입구에서 신호가 끊기고 화면이 흔들리면 관객은 「아, 들어왔구나」 하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시정 요청. 기기를 끄지 않고도 사람을 가둘 방법을 연구해 주시기 바란다. 다행히 이 영화는 뒤에서 그 연구 결과를 조금 보여 준다. 그 얘기는 아래에서 하겠다.
민원 3. 인원 배정 오류 — 공포 채널 운영자
장면은 세정이 고스트박스라는 장비를 켜는 대목이다. 그 저수지는 옛날부터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터로 유명하다고 세정이 앞서 말해 둔 터다. 장비에서 목소리가 나온다. 몇 명이서 왔느냐, 뭐 하러 왔느냐. 폐건물 생중계 영화가 흥한 뒤로 한국 공포영화의 촬영팀에는 반드시 공포 채널 운영자 한 분이 배정되는데, 이분의 직무는 두 가지다. 장비를 켜서 관객에게 귀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그리고 그 장비 때문에 귀신의 관심을 사는 것. 세정 님께는 죄송하지만 이 배정은 너무 익숙하다. 시정 요청. 장비 없는 사람에게도 귀신이 공평하게 말을 걸어 주시기 바란다. 다만 몇 명이 왔느냐는 질문은 좋았다. 머릿수를 세는 귀신은 처음 뵙는다.
민원 4. 처리 순서 고지 — 밉상 우선
장면은 경태가 수인의 지시를 무시하고 360도 카메라를 들고 혼자 걷는 대목이다. 촬영 끝나면 낚시도 하겠다던 분이다. 그러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달아나고, 나중에 나무에 매달린 채 발견된다. 공포영화에는 「초반에 밉게 보인 분이 먼저 처리된다」는 순서가 있고, 이 영화는 그 순서를 지켰다. 관객으로서 억울한 것은, 그래서 경태가 당하는 장면에서 무섭기보다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점이다. 시정 요청. 처리 순서를 한 번쯤 뒤집어 주시기 바란다. 가장 착한 분이 먼저 가면 관객은 진짜로 겁을 먹는다.
민원 5. 구조 인력 사칭 — 경찰
장면은 성빈과 세정이 차를 몰아 빠져나가는 대목이다. 경찰이 나타난다. 알고 보면 경찰이 아니다. 밤길에 도망치는 인물 앞에 제복이 나타나면 그 제복은 열에 아홉 가짜이며, 이 영화도 아홉 쪽이다. 그 뒤로 세정은 웃으면서 차바퀴 밑으로 가고, 성빈은 보이지 않는 힘에 목이 돌아간다. 둘의 끝은 이 영화에서 눈으로 가장 센 대목인데, 그 앞에 놓인 가짜 경찰이 너무 익은 길이었던 것이다. 시정 요청. 구조대를 사칭할 때는 사칭하는 쪽도 조금은 머뭇거려 주시기 바란다. 바로 들통나는 사칭은 사칭이라 하기 민망하다.
그래도 구수한 것 하나
물수제비다. 경준과 성빈이 물가에서 농담하며 돌을 던지는데, 던진 돌이 되돌아온다. 화면 일부를 어둡게 가리고 소리로 처리한 장면이라고 촬영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다. 돌 하나 던지고 돌 하나 돌아오는 것뿐인데 나는 여기서 숨을 참았다. 이 영화가 장비와 제복과 결재 라인을 다 빌려 오면서도 정작 가장 무서운 장면을 돌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이 구수하다. 민원 2에서 말한 「기기를 끄지 않고 가두는 법」도 여기 있다. 경태의 360도 카메라에 사람 눈으로는 안 보이는 것이 잡히는 대목이 그것인데, 길 안내가 꺼져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켜져 있어서 무서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쪽이 이 영화의 제 길이었다고 본다.
답변서
영화를 대신해 답변서를 써 보면 이렇다. 「귀하의 민원은 잘 접수되었습니다. 저희 저수지는 사연을 설명하지 않는 쪽을 택했습니다. 감독도 인터뷰에서 이유 없이 존재하는 악의가 더 무섭다고 밝혔습니다. 사연이 없으니 인물들을 물가로 모으는 핑계는 익숙한 것들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 익숙함 덕에 관객이 쉴 틈 없이 95분을 저수지에 머물 수 있었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희는 상사·길 안내·장비·제복을 빌려 쓴 대신, 물에 몸이 닿은 사람은 데려간다는 규칙 하나만은 끝까지 지켰습니다. 마지막 탕비실 장면에서 싱크대로 넘치는 검은 물과, 물속에서 눈을 뜬 수인이 아무것도 믿지 말라고 하는 끝맺음은 그 규칙의 연장입니다. 민원 다섯 건 중 시정 가능한 것은 다음 작품에서 검토하겠습니다.」 아무튼. 답변서가 민원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좀 억울하다.
볼까 말까 물으신다면, 저수지의 익은 길들을 알고 가되 물수제비 장면에서는 숨을 참으시라고 하겠다. 어디까지가 계산이고 어디까지가 우연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추신. 다 보고 나서 나는 주말 상사 전화를 어떻게 받을지 정했다. 받지 않는다.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