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살목지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내 대신 간 사람
못난 고백부터 한다. 나는 겁이 나면 일을 넘긴다. 하기 싫은 전화, 가기 싫은 자리, 열어 보기 무서운 봉투 같은 것들을 「네가 더 잘하잖아」라는 말로 포장해서 남에게 밀어 둔 게 몇 번인지 세고 싶지 않다. 고백은 여기까지다.
아무튼 「살목지」를 봤다. 로드뷰 서비스 회사의 PD 수인이 지도 화면에 찍힌 적 없는 형체 때문에 저수지 재촬영 지시를 받고 팀을 꾸려 가는 공포영화다. 2026년 4월에 나왔고 95분이다. 귀신이 나오고 사람이 하나씩 물에 닿는다. 그런데 나는 귀신보다 수인이 거기 다시 간 이유에 더 오래 걸렸다.
영화는 그 사정을 자막으로 풀어 주지 않는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을 옮기면 이렇다. 원래 그 저수지 촬영은 수인의 일이었다. 처음 갔을 때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돌아왔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대신 간 사람이 선배 교식이고, 교식은 연락이 끊겼다. 감독은 수인이라는 인물을 떠나보낸 사람에 대한 죄책감을 중심으로 세웠다고 했다. 이름도 그렇게 지었단다. 가둘 수에 사람 인. 저수지에 갇힌 사람이자 죄책감에 갇힌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릴 때 물에서 죽을 뻔해 물을 두려워하는 인물로 잡았다는 말도 있었다.
여기서 내가 한 짓이 그대로 겹친다. 겁이 나서 돌아왔고, 그 일을 남에게 넘겼다. 수인이 한 첫 번째 행동은 내가 늘 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좀 그랬다. 저 사람도 나랑 같은 부류구나 싶어서. 감독은 영화 전반에서 수인이 계속 가라앉아 있는 상태이길 바랐다고 했는데, 나는 그 얼굴을 안다. 넘겨 둔 일이 있는 사람의 얼굴이 그렇다. 내 얼굴이 그렇다.
수인이 나와 다르게 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다시 갔다. 대신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자 수인은 그 저수지로 돌아간다. 재촬영 지시가 떨어졌다는 핑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저수지 공터에 차를 대다가 돌탑을 건드려 무너뜨리고, 나타난 할머니에게서 소원을 빌며 정성껏 다시 쌓으라는 경고까지 듣고도 수인은 그 자리에 남아 촬영을 한다. 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물가에 서 있는 것이다. 나라면 돌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차를 돌렸다. 그러고는 「거기 좀 이상하더라」고 사무실에 보고했을 것이다. 이상한 줄 알면서 남아 있는 쪽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늘 차를 돌리는 사람이 가장 잘 안다.
겁 없는 사람도 영화에 있다. 로드뷰 촬영을 맡은 경태와 경준 형제는 이 일을 가볍게 여기고 남는 시간에 낚시나 하려 든다. 귀신을 믿지 않고, 리더인 수인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인다. 감독은 이 둘을 공포영화에서 「쟤 죽겠네」 싶게 만드는 인물로 의도했다고 했다. 그러니 저수지에 남은 사람은 두 종류다. 겁이 없어서 남은 사람과, 겁이 나는데 남은 사람. 나는 앞쪽을 부러워한 적이 없다. 겁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은 내가 못 하는 일이 아니라 안 하는 일이라고 믿어 왔다. 뒤쪽은 다르다. 겁이 나는데 남는 것은 내가 못 하는 일이다.
둘째, 보고 싶어 했다. 감독은 실제 저수지에 돌탑이 스무 개에서 서른 개쯤 있었다고 했고, 영화에서 그 돌탑을 소원을 들어주는 장치로 생각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결국 귀신을 불러내는 구조라고도 했다. 그러니 수인이 돌 앞에서 빌었다면 그 소원은 아마 교식을 다시 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넘긴 일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지 않다. 결과를 모르는 쪽이 편하다. 수인은 결과를 보러 갔고, 실종됐던 교식이 현장에 돌연 나타나 그 결과가 눈앞에 선다. 내가 넘긴 일을 대신 하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거기 서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수인보다 먼저 도망치고 싶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수인을 너무 띄운 것 같아 투덜거리고 싶어진다. 영화는 수인의 선택이 옳았는지 끝내 말해 주지 않는다. 수인과 기태가 저수지를 빠져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사무실 장면이 환상이 아니냐는 해석이 많고, 물귀신이 무사히 돌아온 환상을 심어 놓고 다시 물로 끌어당기는 거라는 풀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감독은 귀신의 사연을 설명하지 않은 것도 의도였다고 했다. 이유 없이 존재하는 악의가 더 무섭다고, 「왜 저러는 거지」가 아니라 「그냥 잘못 걸렸네」가 더 큰 공포라고. 그러면 수인이 다시 간 게 무슨 소용인가. 잘못 걸린 사람에게 책임이고 뒷감당이고가 어디 있나. 나는 이 대목에서 내 쪽에 유리한 결론을 하나 꺼내려 했다. 봐라, 가도 소용없다.
졌다. 소용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에서 돌탑을 쌓지 않은 사람은 기태 한 명이고, 그래서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는다고 감독은 설명했다. 기태라는 이름은 수인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지었단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끝까지 멀쩡한 사람은 소원이 없는 사람이다. 수인은 소원이 있어서 가라앉았고, 가라앉은 채로 갔다. 소원 없이 멀쩡한 쪽이 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수인처럼 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정리가 안 된다.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고 얄밉다. 겁먹은 채로 가는 사람은 그보다 더 얄밉다.
수인아, 나는 아직 사무실에 있다. 네가 거기까지 간 것만으로 나보다 백 번 낫다.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