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살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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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으러 간 사람들, 두 번
503. 2018년 봄에 나온 「곤지암」의 끝에서 밝혀지는 숫자다. 폐병원 생중계를 보고 있다고 리더가 믿었던 시청자 백만 명은 없었고, 실제로 보고 있던 사람은 오백 명 남짓이었다. 그 영화의 공포는 마지막에 이 숫자 하나로 방향을 바꾼다. 귀신보다 먼저 들통나는 것은 사람의 셈이다.
「살목지」를 보고 나서 이 숫자가 떠올랐다. 두 영화는 멀리서 보면 같은 영화다. 카메라를 든 젊은 사람들이 괴담이 붙은 장소로 간다. 장비가 먼저 이상을 감지하고, 사람이 하나씩 사라지고, 마지막에 남은 사람도 온전하지 않다. 배급사가 같고, 벽면까지 화면으로 쓰는 특별관 형식을 앞세운 것도 같다. 그래서 「살목지」가 「곤지암」의 되풀이라는 평이 개봉 즈음부터 있었고, 나는 그 평이 틀렸다고 말할 생각이 없다. 다만 되풀이라는 말로 끝내면 두 영화가 같은 문제 앞에서 다른 쪽을 택한 지점이 지워진다. 그 지점을 적어 두려고 한다. 「곤지암」 쪽은 기억에 기대지 않고 기사와 자료로 다시 확인했음을 밝힌다.
곤지암: 카메라가 곧 눈이다
제작 정보부터 적는다. 「곤지암」은 2018년 3월 28일에 개봉했다. 영상자료원 기준 94분. 「기담」을 만든 감독이 11년 만에 내놓은 공포영화다. 공포 채널 「호러타임즈」의 일곱 사람이 경기도의 폐정신병원에 들어가 생중계를 하는 이야기이고, 리더 하준은 바깥의 베이스캠프에서 화면을 보며 지시한다. 배우들이 고프로와 드론, 열화상 카메라를 직접 들고 찍었다. 그러니 관객이 보는 모든 화면은 인물 중 누군가가 찍은 화면이다. 카메라 바깥은 없다.
이 선택이 만드는 장면 하나. 일행은 처음에 거짓 공포를 연출한다. 조회수를 위해 미리 짜 둔 소동이 있다. 그러다 진짜가 온다. 지현이 멍하니 서서 눈이 검게 변하고, 402호 문이 열리고, 안은 물이 차 있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이 모든 것을 인물의 카메라로만 본다는 점이다. 거짓 공포와 진짜 공포가 같은 렌즈를 지나오기 때문에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어느 쪽인지 가릴 수 없게 된다. 영화는 그 혼란을 마지막에 숫자로 정리한다. 승훈이 조작을 고백하는 순간 방송은 끝나고, 보고 있던 사람은 503명이었다. 「곤지암」이 택한 것은 카메라를 믿는 사람의 눈을 빌려 그 믿음이 어떻게 속임수와 섞이는지를 보여 주는 쪽이다. 귀신의 사연은 폐병원의 소문으로 충분했고, 영화는 사람 쪽의 사연에 공을 들였다.
살목지: 카메라는 사람보다 많이 본다
「살목지」는 단편 공포영화를 계속 만들어 온 감독의 첫 장편으로 2026년 4월 8일에 개봉했다. 95분. 로드뷰 서비스 회사의 PD 수인이 저수지 로드뷰에 찍은 적 없는 형체가 잡혔다는 이유로 재촬영 지시를 받고, 촬영 업체를 하는 경태·경준 형제, 막내 성빈, 공포 채널을 하는 세정과 함께 저수지로 간다. 병가 중이라던 선배 교식이 그곳에 먼저 와 있고, 전 남자친구 기태가 뒤에 합류한다. 여기서 카메라는 인물의 눈이 아니다. 영화는 바깥에서 인물을 찍는다. 그리고 그 바깥의 시선 중 하나가 로드뷰용 360도 카메라다.
같은 문제, 곧 「카메라에 무엇이 잡히는가」를 이 영화는 다르게 푼다. 경태가 수인의 말을 듣지 않고 360도 카메라를 들고 혼자 걷는 장면.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각도에 무언가가 들어온다. 「곤지암」에서 카메라는 사람이 보는 것을 함께 보는 장치였는데, 「살목지」에서 카메라는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장치다. 세정의 고스트박스가 몇 명이 왔느냐고 묻는 목소리를 내보내는 장면도 같은 자리에 있다. 장비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말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인물들이 겪는 혼란은 「곤지암」의 혼란과 종류가 다르다. 「곤지암」의 인물은 진짜와 가짜를 가리느라 혼란하고, 「살목지」의 인물은 전부 진짜인데 뜻을 모르기 때문에 혼란하다. 촬영감독은 인터뷰에서 위에서 똑바로 내려다보는 직부감 샷이 들어갈 때마다 인물이 죽도록 콘티 단계부터 설계했다고 했다. 누군가 계속 지켜보는 느낌을 주려 했다는 것이다. 「곤지암」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시청자였고, 「살목지」에서 지켜보는 것은 이름이 없다.
그 혼란이 어디로 가는지를 결말이 보여 준다. 수인은 보트 위에서 기태가 교식의 얼굴로 바뀌어 자기가 죽은 자리를 가리키며 말하는 것을 듣는다. 원래 그 저수지 촬영은 수인이 맡은 일이었고, 수인이 일을 바꾸는 바람에 교식이 대신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정이 여기서 드러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수인이라는 인물을 떠나보낸 사람에 대한 죄책감을 중심으로 세웠다고 했다. 영화의 마지막, 회사 탕비실에서 싱크대로 검은 물이 넘치고 기태가 자기가 아직 물속에 있음을 아는 장면은 그 죄책감의 자리에 이번에는 기태를 앉힌다. 「살목지」가 택한 것은 카메라와 장비를 다 쥐어 주고도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게 하는 쪽이다. 사연은 귀신에게 주지 않고 사람에게만 주었다. 감독 말대로 이유 없이 존재하는 악의가 귀신의 몫이다.
무엇을 택했는가
반대 의견을 먼저 성실하게 적겠다. 「살목지」가 「곤지암」보다 덜 새롭다는 지적은 맞다. 인물 구성이 비슷하고, 장비가 먼저 반응하는 순서도 비슷하고, 초반에 거슬리는 인물이 먼저 당하는 수순도 그대로다. 「곤지암」에는 503이라는 마지막 한 수가 있어서 영화 전체가 그 한 수로 다시 읽히는데, 「살목지」의 마지막 한 수인 탕비실 장면은 아직 안 끝났다는 쪽으로만 작동하고 앞의 장면들을 다시 읽게 만들지는 않는다. 큰 한 방이 없다는 평이 나온 이유를 나는 이해한다. 죽음 장면들이 멀리서 내려다보는 부감으로 처리되어 힘이 빠진다는 평도 있었다. 지켜보는 시선을 만들려던 선택이 가까이서 겁을 주는 일과 맞바꾼 셈이고, 그 값은 영화가 치렀다.
그래도 두 영화가 택한 것이 다르다는 사실은 남는다. 「곤지암」은 보는 사람의 영화다. 시청자 수를 세고, 조작을 고백하고,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를 끝까지 의식한다. 그 영화의 귀신은 보는 사람의 욕심이 불러온 결과처럼 놓인다. 「살목지」는 보는 사람이 없는 영화다. 세정의 채널을 몇 사람이 보는지 영화는 알려 주지 않고, 로드뷰 화면을 볼 사람들은 회사로 걸려 온 항의로만 존재한다. 저수지에 온 사람들은 보여 줄 대상이 없는 채로 찍는다. 그래서 「살목지」의 장비는 누구를 속이는 도구가 아니라 무언가 있음을 아는 도구로만 쓰이고, 그 앎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이 영화의 공포다. 정확히 말하면, 「곤지암」은 카메라를 거짓의 도구로 놓고 그 거짓이 들통나는 데서 끝났고, 「살목지」는 카메라를 참의 도구로 놓고 그 참이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는 데서 끝났다.
어느 쪽이 나은가를 묻는 자리가 아니다. 다만 「살목지」가 「곤지암」을 베꼈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두 영화에서 카메라가 하는 일이 반대라는 점은 함께 말해 주셨으면 한다. 같은 장비를 들고 간 사람들이 한쪽은 속이다 들통났고, 한쪽은 알고도 못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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