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0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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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끝난 뒤
헌신은 아무것도 지켜 주지 않는다. 세상 대부분의 기도가 그렇게 끝난다.
2020년에 넷플릭스가 내놓은 영화다. 안토니오 캄포스가 연출했고, 도널드 레이 폴록의 소설이 원작이며, 소설가가 직접 내레이션을 맡았다. 138분이다. 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오하이오의 노컴스티프와 웨스트버지니아의 콜크리크를 오간다. 전쟁터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병사를 보고 돌아온 윌러드 러셀은 식당에서 일하던 샬럿을 만나 결혼하고, 숲에 십자가를 세우고 쓰러진 나무를 기도 자리로 삼는다. 아내 샬럿이 암에 걸리자 아들의 개를 죽여 거기 바친다. 영화는 여기서 기적을 주지 않는다. 아내는 죽고 윌러드는 그 십자가 아래에서 목을 긋는다. 넣을 수 있었던 장면이 있다. 마지막 순간의 회복, 하늘의 응답, 아들의 용서. 영화는 하나도 넣지 않는다. 그런 장면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전쟁으로 열고 전쟁으로 닫는다. 아버지가 가져온 것은 둘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병사의 기억과 루거 권총. 아들이 마지막에 듣는 것은 라디오다. 대통령이 베트남에 군대를 더 보내겠다고 말한다. 이십 년 동안 한 집안이 겪은 일이 그 두 전쟁 사이에 끼어 있다. 영화는 이것을 역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지나간다. 나는 그 무심함이 옳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망가지는 데에는 대개 거창한 이유가 없다. 전쟁이 있었고, 병이 있었고, 목사가 있었다. 그뿐이다.
같은 일이 한 번 더 일어난다. 거미를 얼굴에 올리고 설교하던 로이 래퍼티는 자기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아내 헬렌을 드라이버로 찌르고 되살리려 한다.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는 길에서 차를 얻어 탄다. 남자가 사진을 찍고 여자가 미끼가 되어 히치하이커를 죽이는 부부의 차다. 로이는 거기서 죽는다. 믿음이 큰 사람 둘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무너진다. 영화는 둘 중 누구도 비웃지 않는다. 다만 응답을 주지 않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가족을 죽인 사람은 둘 다 기도하던 사람이다. 나는 그 점이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착한 아이가 끝에 가서 보상받는다고 믿는다. 레노라는 이 영화에서 가장 착한 아이다. 그 로이와 헬렌의 딸이고, 부모를 둘 다 잃고 아빈의 할머니 집에서 자랐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기도를 놓지 않는다. 새로 온 목사 프레스턴 티가딘을 믿었고, 그는 그 믿음을 썼다.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자 그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나중에 아빈 앞에서는 레노라 탓을 하다가, 결국 자기 평판에 사생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까지 한다. 믿음을 받은 사람이 믿음을 쓴 뒤에 하는 말은 대개 그렇다. 헛간에서 양동이 위에 올라섰다가 마음을 바꾼다. 내려오려다 발을 헛디딘다. 그렇게 죽는다. 마음을 바꾼 사람에게도 구원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다.
부당한 장면은 따로 있다. 보안관 리 보데커는 연쇄살인범 샌디의 오빠다. 동생 부부가 죽고 그들이 피해자를 찍어 둔 사진이 나오자 그는 그것을 태운다. 재선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가 있었고 사진이 있었다. 그 둘을 한 손에 쥔 사람은 대개 그렇게 한다. 세상은 그렇게 생겼다. 이 영화의 쓴웃음이 있다면 여기다. 악당이 거창하지 않다. 하나같이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다. 목사는 평판을 지키려고 아이를 버렸고, 보안관은 자리를 지키려고 증거를 태웠다. 지키려는 것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망가뜨린다.

두 아이를 거둔 사람은 할머니 에마다. 아들을 잃고 손자를 받았고, 부모 잃은 여자애까지 받았다. 그 집에서 가장 많이 잃은 사람이다. 영화는 그녀에게도 보상을 주지 않는다. 손자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난다. 나는 그 쪽지가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작별이라고 생각한다. 돌아오겠다는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아빈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신을 탓하지도 않는다. 자기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 동생이 죽은 뒤 목사를 쏘고, 자기를 죽이려던 부부를 쏘고, 쫓아온 보안관을 쏜다. 나는 거기서 후련하지 않았다. 후련하라고 만든 장면도 아니다. 총을 쏘고 나서 그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 죽어 가는 보안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고, 부부가 찍은 사진을 그 옆에 둔다. 자기가 옳았다고 떠들지 않는다. 사실이 드러나게만 해 둔다.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호소 대신 배치. 원망하지 않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르다. 그는 용서하지 않는다. 쏜다. 다만 쏘고 나서 자기를 변명하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둘이다. 기도와 주먹. 아빈은 어릴 때 아버지가 밀렵꾼들을 때리는 것을 봤고, 커서는 똑같이 때린다. 영화는 이것을 대물림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 준다. 설명하지 않는 쪽이 더 무겁다. 그 둘 중 아빈이 끝까지 가져가는 것은 하나뿐이다. 기도는 아버지와 함께 묻혔다. 주먹은 남았다. 영화는 그것을 승리로 그리지 않는다. 그가 떠난 뒤 목사의 죽음이 알려지고, 그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대가는 치러진다. 늦게, 그리고 전부.
마지막 장면은 땅을 파는 장면이다. 아빈은 아버지가 기도하던 통나무 자리로 돌아와 개의 뼈를 묻는다. 거기에 아버지가 전쟁에서 가져온 루거 권총을 같이 묻는다. 그 자리는 아버지의 시체를 찾은 자리고 개가 매달렸던 자리다. 거기로 돌아온 이유를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가 바친 것과 아버지가 남긴 것을 한 구덩이에 넣는다. 대단한 장면이 아니다. 뼈와 총을 넣고 흙을 덮는다. 그러고 길로 나가 차를 얻어 탄다. 그 마을에 돌아와서 그가 한 일은 어릴 때 자기를 받아 준 가게 주인에게 고맙다고 말한 것과 땅을 판 것뿐이다. 대단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응답받은 기도가 있다면, 기도를 그만두고 삽을 든 그 장면이다.
지금 누군가를 지키려고 무릎을 꿇고 있는 당신에게. 기도는 그것을 지켜 주지 않는다. 그다음에 할 일이 있을 뿐이다. 그건 남이 대신 못 한다. 삽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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