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0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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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은 어디에 남는가
나는 사진을 지우지 못한다. 휴대전화에 사진이 만 장 넘게 들어 있다. 흔들린 사진, 같은 찌개 세 장, 바닥만 찍힌 사진, 누군지 모를 사람의 뒤통수, 주차한 자리, 영수증. 지우려고 앨범을 열면 결국 한 장도 못 지우고 닫는다. 이것은 추억이 아니다. 추억이라면 가끔 들여다보기라도 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증거다. 무엇의 증거인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거기 있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그런 내게 이 영화는 사진에 관한 영화로 보였다. 2020년 가을 넷플릭스가 공개한 두 시간 십팔 분짜리 영화다. 안토니오 캄포스가 동생 파울로와 각본을 쓰고 연출했고, 원작 소설가 도널드 레이 폴록이 직접 내레이션을 맡았다. 1945년에서 1965년까지, 오하이오의 노컴스티프와 웨스트버지니아의 콜크리크를 오가며 전쟁에서 돌아온 남자, 거미를 얼굴에 붓는 설교자, 사진 찍는 살인자 부부, 새로 온 목사, 보안관이 한 소년에게 모여든다. 줄거리로 요약하면 그렇다. 뼈대로 잡으면 이렇다. 악당이 모이는 영화가 아니라 증거가 모이는 영화다. 본 것을 잊지 못한 사람으로 시작해, 본 것을 두고 떠나는 사람으로 끝난다.
아버지 윌러드가 먼저다. 그는 전쟁터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병사를 본다. 그 장면을 가지고 집에 온다. 루거 권총도 가지고 온다. 집 뒤 숲에 십자가를 세우고 쓰러진 나무 앞에 아들을 무릎 꿇린다. 아내가 암에 걸리자 아들의 개를 죽여 거기 바친다. 아내는 죽고 그는 그 나무 앞에서 죽는다. 아홉 살 아들 아빈이 발견한다. 한편 설교자 로이는 믿음을 증명하려고 거미 한 병을 얼굴에 붓는다. 물린다. 그 뒤로 자기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믿게 되고, 아내 헬렌을 드라이버로 찌른다. 살아나지 않는다. 무덤은 칠 년 뒤에 발견된다. 그의 사촌 시어도어는 믿음을 증명하려고 부동액을 마시고 휠체어에 앉는다. 이 영화에서 무엇인가를 증명하려는 사람은 하나같이 무엇인가를 잃는다. 개, 아내, 다리, 그리고 자기 목숨.

그리고 칼이 있다. 칼은 카메라를 든다. 아내 샌디가 미끼가 되어 길가의 젊은 남자를 차에 태우면, 칼은 외딴 곳에 차를 세우고 샌디 곁에서 죽어 가는 남자를 찍는다. 찍고, 죽이고, 또 찍는다. 그는 그들을 모델이라 부른다. 내레이션은 그에게 이것이 종교였다고 말한다.
죽음 앞에서만 그는 신의 존재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었다.
로이는 죽은 사람을 살리려 했고 칼은 산 사람을 죽여 찍는다. 두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같은 일을 한다. 신이 거기 있다는 증거를 손에 쥐려는 일이다. 다만 로이는 실패했고 칼은 사진을 얻는다. 필름 위에 무엇인가가 남기는 한다. 그것이 신인지는 모르겠다. 내 휴대전화에 남은 것도 무엇인가이긴 하다. 이 영화 자체가 35밀리 필름으로 찍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사진 찍는 남자를 필름으로 찍은 셈이다. 우연이겠으나, 우연을 뜻으로 읽는 것은 내 오랜 병이다.

칼의 카메라 앞에 로이가 앉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아내를 묻고 길에서 차를 얻어 탄 로이는 소풍 돗자리 위에 샌디와 함께 앉으라는 말을 거절한다. 칼은 그를 쏜다. 사진이 되기를 거부한 모델은 모델이 아니다. 그는 찍히지 않고 죽는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품위 있는 죽음인가 하면, 나는 그렇게까지 말할 자신이 없다. 그저 사진 한 장이 덜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사진이 몇 장 남았느냐가 이 영화의 끝에서 중요해진다.
본다는 것은 가진다는 뜻이다. 윌러드는 십자가의 병사를 보았고, 그 장면은 그의 것이 되어 오하이오까지 따라왔다. 가진다는 것은 잃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진 것을 어딘가에 옮겨 둔다. 윌러드는 숲속 십자가로 옮겼고, 칼은 필름으로 옮겼고, 새로 온 목사 티가딘은 설교로 옮겼다. 감독은 칼과 티가딘이 같은 선 위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소녀들에게 옷을 벗어 신께 자신을 열라고 말하는 목사와, 죽어 가는 남자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남자. 한쪽은 신을 핑계로 보고, 한쪽은 보는 것을 신이라 부른다. 둘 다 자기가 본 것은 남기고 자기가 한 일은 남기지 않는다. 티가딘이 레노라에게 한 일은 헛간의 양동이 하나로 끝났고, 그 양동이는 아무것도 증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진은 찍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뒤늦게 알려 주는 사실이다. 칼과 샌디의 차에 마지막으로 올라탄 히치하이커가 아빈이다. 아버지의 루거를 가진 아들이다. 칼이 사진을 찍고 싶다며 외딴 곳에 차를 세우고, 아빈은 칼의 총을 먼저 보고 먼저 쏜다. 샌디의 총에는 공포탄뿐이다.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해 바꿔 둔 것이다. 그런 뒤 아빈은 차에서 사진 한 장과 필름 한 통을 챙긴다. 칼이 신을 보려고 모은 것이 이제 한 소년의 알리바이가 된다. 사진은 찍은 사람의 믿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사진은 그저 거기 있었던 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아무나 집어 들 수 있다.
그 사진을 가장 두려워한 사람은 보안관 보데커다. 샌디의 오빠다. 동생 부부의 사진 뭉치를 찾아낸 그는 그것을 태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거가 있다. 그는 어린 아빈에게 어떤 사람은 묻히려고 태어난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그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사진은 태워지려고 찍힌다는 것은 이 영화가 보여 준다. 다만 그는 한 장을 세지 못했다. 아빈이 챙긴 한 장. 보데커는 숲속 통나무까지 아빈을 쫓아갔다가 거기서 총에 맞고, 아빈은 죽어 가는 그의 곁에 그 사진을 놓는다. 태운 사람 옆에 태우지 못한 한 장을 둔다. 복수라기보다 서류 정리에 가깝다. 증거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
이 영화의 바깥에서도 사진은 쌓인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장을 찍는다. 밥, 영수증, 주차한 자리, 회의실 칠판, 아이의 뒤통수, 하늘. 찍으면서 보고, 찍고 나면 보지 않는다. 그런데 언젠가 누군가 그 사진을 집어 들 것이다. 보험사, 변호사, 자식, 혹은 나 자신. 그때 사진은 내가 무엇을 믿었는지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것만 말할 것이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그때 누가 집어 드느냐에 달렸다. 영화는 이 점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태우는 사람 편도, 놓고 가는 사람 편도.
마지막에 아빈은 아버지의 루거를 개의 뼈와 함께 묻고 길로 나간다. 빨간색과 흰색의 폭스바겐 캠핑카가 선다. 머리 긴 남자가 신시내티로 간다고 한다. 라디오에서 대통령이 베트남에 군대를 더 보내겠다고 말한다. 내레이션은 그가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하고, 지금은 잠이 필요했고 누가 태워 준 것이 그저 고마웠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전쟁에서 본 것으로 시작한 영화가, 아들이 전쟁으로 가게 될지 모르는 자리에서 끝난다. 그는 사진을 두고 왔다. 총도 두고 왔다. 그러나 본 것은 두고 올 수 없다. 그것은 필름이 아니라 사람에 남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사진을 지우지 못했다. 만 장이 넘는 증거가 휴대전화에 있다. 누가 집어 들지는 모른다. 그때까지는 내 것이라고 해 두자. 그 정도 믿음은 괜찮지 않겠나. 아니면 그것도 종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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