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4

스픽 노 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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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분이 바꾼 것

막판뒤집기· 2026. 10. 26.· 2,949자

98분과 110분. 2022년 덴마크 영화의 길이와 2024년 미국 영화의 길이다. 열두 분이 늘었다. 그 열두 분 안에서 결말이 정반대로 뒤집힌다. 짧은 쪽에서는 손님 가족이 죽고, 긴 쪽에서는 손님 가족이 살아서 집주인을 죽인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찍었는데 끝이 반대인 경우는 흔하지 않다. 무엇을 바꿨길래 그렇게 되는지 표로 놓고 보고 싶었다.

먼저 적어 둘 것이 있다. 나는 원작을 보지 않았다. 원작에 관한 내용은 기사와 리뷰로 확인한 것이고, 본 척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아래 비교는 두 영화를 나란히 본 사람의 비교가 아니라, 한쪽은 눈으로 보고 다른 쪽은 글로 읽은 사람의 비교다. 틀린 곳이 있을 수 있다.

틀부터 적는다. 원작은 크리스티안 타프드루프가 연출하고 동생 마스 타프드루프와 함께 각본을 쓴 덴마크·네덜란드 합작 영화다. 덴마크 제목은 「손님들」이라는 뜻이고, 2022년 1월 선댄스에서 처음 상영됐다. 이 작품은 제임스 왓킨스가 각본과 연출을 맡고 블룸하우스가 제작했다. 한국에서는 2024년 9월 11일에 개봉했고 러닝타임은 110분이다. 제임스 맥어보이가 집주인 패디를, 맥켄지 데이비스와 스쿳 맥네이리가 손님 부부 루이스와 벤을 맡았다. 휴양지에서 만난 두 가족, 시골집 초대, 점점 선을 넘는 집주인, 혀가 없는 아들. 여기까지는 두 영화가 거의 같다. 리뷰 여럿이 앞의 3분의 2는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고 적었다.

스픽 노 이블 스틸컷

바뀐 것

  • 국적과 장소. 원작 / 덴마크 부부 비외른과 루이세가 토스카나에서 네덜란드 부부 파트리크와 카린을 만나고, 네덜란드의 외딴 집으로 간다. 이 작품 / 런던에 사는 미국인 부부 벤과 루이스가 이탈리아에서 영국인 부부 패디와 키아라를 만나고, 데번의 농가로 간다.
  • 가는 결정을 누가 하는가. 원작 / 남편이 망설이는 아내를 밀어서 초대를 받아들인다. 이 작품 / 처음에 망설이던 루이스가 먼저 가자고 한다.
  • 손님 부부의 상태. 원작 / 부부 사이가 비교적 무난하다. 이 작품 / 벤은 일자리를 잃었고, 런던으로 옮긴 데 대한 앙금과 바람 문제가 밑에 깔려 있다.
  • 진실이 드러나는 방식. 원작 / 아버지가 우연히 집주인의 전리품 방을 발견한다. 이 작품 / 아들 앤트가 몇 번이고 알리려 하다가 열쇠를 훔쳐 애그니스를 창고로 데려가고, 거기서 다른 가족들의 사진첩을 본다.
  • 동기. 원작 / 설명이 없다. 이 작품 / 손님의 은행 계좌에 손을 대 돈을 빼내는 것이 보태진다. 창고에서 사진 여덟 장과 시계 아홉 개가 나온다고 한다. 어림잡아 이 가족이 아홉 번째 표적이라는 뜻이다. 키아라는 자기도 어릴 때 데려와진 첫 희생자였다고 말하는데, 영화는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정해 주지 않는다.
  • 결말. 원작 / 아들 아벨은 물에 빠져 죽고, 딸 애그니스는 혀가 잘린 채 집주인 부부의 새 딸이 되며, 부모는 돌에 맞아 죽는다. 마지막 장면은 집주인의 차 뒷자리에 앉은 애그니스다. 이 작품 / 루이스가 망치로 공범 마이크를 죽이고 키아라를 지붕에서 떨어뜨린다. 애그니스는 자기한테 놓으려던 케타민 주사를 패디에게 꽂고, 앤트가 벽돌로 패디를 내려친다. 네 사람은 마이크의 차를 타고 떠난다. 차 안에서 애그니스가 토끼 인형을 앤트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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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바꿨을까, 추측 셋

이유는 만든 사람만 안다. 나는 추측만 할 수 있고, 추측은 추측이라고 적는다.

첫째, 아마 결말을 바꾸려면 앞을 먼저 바꿔야 했을 것이다. 원작의 부모는 끝까지 저항하지 않는다. 그 무저항이 원작의 핵심이라고 여러 글이 말한다. 이 작품의 부모가 마지막에 싸우게 하려면 싸울 수 있는 사람으로 미리 그려 둬야 한다. 그래서 루이스가 가자고 하고, 루이스가 먼저 떠나자고 하고, 루이스가 커터칼을 숨긴다. 결정을 하는 사람을 바꾼 것은 결말을 바꾸기 위한 준비처럼 보인다.

둘째, 동기가 생긴 것은 아마 관객의 질문에 답하려는 선택일 것이다. 왜 이러는 거냐는 벤의 물음에 패디는 「당신들이 그렇게 두었으니까」라고 답한다. 이 한 줄은 원작의 정신에 가깝다. 그런데 그 옆에 돈과 사진첩과 시계가 놓인다. 설명이 없는 악은 보는 사람을 오래 불편하게 하고, 설명이 있는 악은 영화가 끝나면 닫힌다. 어느 쪽이 좋은지는 취향의 문제다. 다만 둘을 같이 두면 서로를 조금씩 깎는다는 생각은 든다. 한 리뷰는 원작이 절제로 버티던 자리를 리메이크가 설명으로 메웠다고 썼다.

셋째, 아이들. 원작에서 두 아이는 당하는 쪽이다. 이 작품에서는 두 아이가 마지막 두 수를 둔다. 주사와 벽돌. 어른이 못 끝낸 일을 아이가 끝낸다. 아마 이것이 이 리메이크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당신들이 그렇게 두었으니까」는 어른에게 하는 말이고, 그 어른들이 치우지 않은 것을 아이들이 치운다.

스픽 노 이블 스틸컷

얻은 것과 잃은 것

얻은 것은 분명하다. 앤트라는 인물이다. 원작의 아벨은 죽는 아이고, 이 작품의 앤트는 경고하고, 보여 주고, 끝내는 아이다. 혀가 없는 아이가 영화 내내 말하려고 애쓰고, 마지막에 벽돌로 말한다. 그리고 애그니스가 토끼를 건네는 장면. 원작에는 이런 장면이 있을 자리가 없다.

잃은 것도 분명하다. 원작은 보고 난 사람을 오래 괴롭히는 영화였다고 한다. 손님이 끝까지 예의를 지키다가 죽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마지막 3분의 1을 집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으로 바꿨고, 그 싸움은 잘 만들어졌지만 다른 영화에서도 본 적 있는 모양이다. 원작의 연출자가 이 결말을 반기지 않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두 영화는 같은 질문을 다르게 닫은 것이다. 예의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이 어디까지 가는가. 원작은 끝까지 간다고 답하고, 이 작품은 어느 지점에서 돌아선다고 답한다. 나는 돌아서는 쪽을 보았고, 돌아서지 않는 쪽은 글로만 읽었다. 글로 읽은 쪽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읽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보지 않은 것은 늘 더 크게 보인다.

열두 분이 더 들어서 네 사람이 살았다. 그 열두 분이 값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이 이야기는 원래 열두 분 짧은 쪽이 맞는 것인지, 나는 아직 답을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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