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4
스픽 노 이블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열여섯 해 뒤에 다시 묻는 질문
2008년 9월과 2024년 9월. 열여섯 해를 사이에 두고 같은 감독이 두 편의 영화를 내놓았고, 두 편 모두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시골로 간다. 하나는 호숫가로, 하나는 농가로. 하나는 아흔한 분이고 하나는 백열 분이다. 나는 이 두 편을 나란히 놓고 보고 싶었다. 감독 자신이 먼저 그렇게 놓았기 때문이다. 리메이크를 맡기로 한 첫 대화에서 그는 자신이 이미 더할 수 없이 어두운 결말을 한 번 만들어 봤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다. 그 「한 번」이 2008년의 영화다.
먼저 적어 둔다. 2008년 영화에 관해 아래에 쓰는 장면은 기사와 리뷰로 확인한 것이다. 본 것처럼 쓰지 않으려 애썼고, 그래도 본 사람의 글처럼 읽히는 문장이 있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다.
전작
「이든 레이크」. 2008년 9월 영국에서 개봉한 감독의 첫 장편이다. 초등학교 교사 제니와 남자친구 스티브가 런던을 벗어나 외진 호숫가로 주말을 보내러 간다. 모래밭에서 쉬는 두 사람 옆으로 동네 십대 무리가 와서 음악을 크게 틀고 큰 개를 풀어 놓는다. 스티브가 그 소리를 두고 아이들에게 말을 건다. 그 말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된다.
확인한 순서는 이렇다. 차 바퀴가 누가 놓아 둔 유리병에 찔려 바람이 빠진다. 식량에 벌레가 든다. 차와 짐이 사라진다. 어두운 숲에서 칼이 오가고, 무리의 대장 브렛이 아끼는 개가 죽는다. 그다음부터 영화는 사냥이 된다. 스티브는 바위에 철조망으로 묶이고, 브렛은 무리 하나하나에게 칼을 들게 한다. 그 자리에 있던 소녀 하나가 그 광경을 휴대전화로 찍는다. 제니는 숨어서 본다.
그리고 끝. 피투성이로 숲을 빠져나온 제니는 남의 차를 몰아 어느 집 뒷마당의 파티로 돌진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 집은 브렛의 집이다. 거실에 모인 어른들은 아이들의 부모다. 브렛은 저 여자가 친구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집주인 남자가 욕실 문을 발로 찬다. 그 뒤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화면은 브렛이 제 방에서 휴대전화의 영상을 지우고 스티브의 선글라스를 쓰는 모습이라고 한다. 당시 평들은 이 결말을 더할 수 없이 어둡고 가차 없다고 적었고, 영국 신문 몇 곳은 영화가 노동계급을 폭력배로 그렸다고 비판했다. 그 논쟁은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다. 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끝까지 아이들을 지킨다. 아이들이 무엇을 했는지 모르면서, 혹은 알면서.
이번 작품
2024년 9월 11일 한국에서 개봉한 「스픽 노 이블」은 2022년 덴마크 영화를 같은 제목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감독이 각본도 썼다. 미국인 부부 벤과 루이스, 딸 애그니스가 이탈리아 휴가지에서 영국인 부부 패디와 키아라를 만나고, 데번의 농가로 초대받는다. 그 집에는 말을 못 하는 아들 앤트가 있다.
이 영화는 어떻게 시작하는가. 밤길을 달리는 차의 앞유리 너머가 첫 화면이고, 뒷거울에 아이의 얼굴이 비친다고 한 리뷰는 적었다. 원작도 비슷하게 시작하지만 이쪽은 더 빨리 끊고 얼굴을 바로 보여 준다는 것이 그 글의 지적이었다. 누구의 차이고 누구의 아이인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다. 그것을 알게 되는 데 영화 한 편이 걸린다.
농가에서의 일들은 이미 다른 글들이 잘 적었다. 식탁과 거위, 춤과 꾸지람, 창고의 사진들, 토끼 인형. 나는 그중 전작과 겹쳐 보이는 장면만 집는다. 앤트가 애그니스에게 알리려 하는 장면들이다. 아이는 서랍 속 시계들을 보여 주고, 그중 하나에 덴마크어로 새겨진 글귀를 가리킨다. 밤에는 애그니스를 깨워 제 몸의 흉터를 보여 주다가 발소리에 다시 눕는다. 끝내 종이에 글을 써서 건네는데 애그니스가 읽지 못하는 말이고, 들킬까 봐 아이는 그 종이를 입에 넣어 삼킨다. 증거를 쥔 사람은 아이이고, 그 증거를 없애는 사람도 아이다.
결말은 이렇게 간다. 가족은 집 안에 들어가 문을 막고, 패디와 키아라와 공범은 밖에서 집을 돈다. 루이스가 망치를 들고, 애그니스가 자기에게 꽂히려던 주사기를 돌려 꽂고, 앤트가 벽돌을 든다. 네 사람은 공범의 차로 떠난다. 마지막 화면은 그 차의 뒷자리에 앉은 앤트의 얼굴이다. 처음 화면이 뒷거울에 비친 아이의 얼굴이었다면, 끝은 거울 없이 바로 찍은 얼굴이다. 이 대칭도 그 리뷰가 먼저 짚은 것이다. 아이는 울고 있다. 감독은 그 장면에 진짜 슬픔이 있고, 그것이 음악과 아이의 얼굴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사이
되풀이되는 것 하나. 증거를 쥔 손이 아이의 손이다. 전작에서 소녀는 묶인 남자를 찍고, 대장은 마지막에 그 영상을 지운다. 이번 작품에서 앤트는 흉터와 시계와 쪽지를 내보이고, 그 쪽지를 스스로 삼킨다. 두 영화 모두에서 어른들은 그 증거를 읽지 못하거나 읽으려 하지 않는다. 전작의 부모는 아들의 말만 믿고, 이번 작품의 부모는 아이가 보낸 신호를 한참 뒤에야 알아듣는다. 열여섯 해가 지나도 감독은 어른을 가장 늦게 깨닫는 사람으로 세운다. 이것은 내 풀이다. 감독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달라진 것 하나. 집 안에 누가 남는가. 전작의 마지막 집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감싸고 손님을 끝낸다. 이번 작품의 마지막 집에서는 아이 둘이 어른을 끝내고 손님들과 함께 떠난다. 아이는 전작에서 사냥하는 쪽이었고 이번에는 사냥을 멈추는 쪽이다. 아이가 증거를 지운 뒤 선글라스를 쓰는 것으로 끝나던 영화와, 아이가 벽돌을 내려놓고 차에 타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 같은 손이 두 번 나오고, 그 손이 하는 일이 반대다.
감독은 이 변화를 숨기지 않았다. 원작의 결말을 두고 그는 자신이 이미 그런 결말을 만든 적이 있고, 관객의 얼굴을 다시 거기에 문지르고 싶지 않았다는 취지로 말했다. 미국인 인물들이라면 끝까지 순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한 가지 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덴마크 원작의 감독이 2008년의 그 영화를 참고로 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리메이크는 자기 영화의 영향을 받은 영화를 다시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고, 그 고리 안에서 결말만 뒤집었다.
그래서 같은 질문을 다시 묻고 있는가. 묻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질문은 이것이다. 예의를 아는 사람이 예의를 모르는 사람 앞에서 언제까지 예의를 지키는가. 2008년의 답은 「끝까지」였다. 2024년의 답은 「어느 밤까지」다. 답이 달라졌으니 다른 영화라고 해야 할까, 질문이 같으니 같은 영화라고 해야 할까. 나는 후자에 조금 더 기운다. 감독이 모두 상처를 입고 나온다고 덧붙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살아서 나온 네 사람의 차 안에 2008년에 죽은 두 사람도 함께 타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이것은 느낌이고 사실이 아니다.
지지하는가. 이번 작품을 지지한다. 다만 한 가지는 망설인다. 전작의 어둠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보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다고들 하는데, 이번 작품의 마지막 삼분의 일은 잘 만든 싸움이지만 다른 영화에서도 본 모양이기도 하다. 열여섯 해 동안 감독이 배운 것이 관객을 놓아주는 법이라면 그것은 성장인가 타협인가. 이 물음은 당신에게 넘긴다.
2008년 9월과 2024년 9월. 두 번 모두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시골로 갔고, 두 번 모두 가장 나쁜 일은 집 안에서 벌어졌다. 한 번은 그 집에 남았고 한 번은 그 집을 떠났다. 떠난 차가 어디로 가는지 영화는 보여 주지 않는다.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