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8
플로리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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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라는 말을 고쳐 쓴다
내가 이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고 있기 때문이야.
여섯 살 무니가 친구 잰시에게 하는 말이다. 둘은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 빵에 잼을 발라 먹고 있다. 이 대사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옮겨 적힌 문장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희망이라 부른다. 나는 이 말에서 다른 낱말을 꺼내 보고 싶다. 마법이다.
영화의 모텔 이름은 매직 캐슬이다. 건너편 놀이공원의 이름은 매직 킹덤이다. 성과 왕국, 둘 다 앞에 마법이 붙어 있다. 영화는 이 말을 대사로는 거의 쓰지 않는다. 간판에만 쓴다. 그런데 보는 내내 그 말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묻는다. 이 영화에서 마법은 무엇인가.
사전은 마법을 초자연적인 힘으로 불가사의한 일을 일으키는 술법이라 적는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힘이다. 호박을 마차로 바꾸고 쥐를 말로 바꾼다. 건너편 왕국이 파는 것이 이것이다. 돈을 내면 성이 보이고, 성 안에서는 공주가 걸어 다닌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데 입장권이 든다.
이쪽 성의 마법은 다르다. 매직 캐슬에서 아이들이 하는 일을 보자. 무지개가 뜨면 무니와 잰시는 그 밑에 금이 묻혀 있고 레프리콘이 지킨다고 말한다. 쓰러진 나무는 비밀 기지가 된다. 관광객에게 잔돈을 얻어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길이 모험이 된다. 여기서 마법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힘이 아니다. 있는 것을 다르게 보는 힘이다. 무지개는 그냥 있고, 나무는 그냥 쓰러져 있고,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이다. 바뀐 것은 사물이 아니라 보는 아이다.
흔한 풀이는 여기서 멈춘다. 가난해도 아이들은 상상으로 행복하다, 그러니 이 영화는 아름답다. 통념이 성실하다는 건 인정한다. 영화는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 색은 밝고 아이들은 웃는다.
나는 다르게 보았다. 이 영화에서 마법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다. 어른이다. 엄마 핼리다.
핼리는 방세가 밀리면 남자를 방으로 부른다. 그때 무니를 욕조에 들여놓는다. 목욕 시간이다. 문을 닫는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이는 모른다. 이것이 마법이다.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마법. 건너편 왕국이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데 입장권을 쓴다면, 이쪽 성의 어른은 있는 것을 없게 하는 데 욕실 문 하나를 쓴다. 물과 문. 그게 핼리가 가진 마법 도구 전부다.
어른의 마법이 하나 더 있다. 핼리의 친구 애슐리는 근처 식당에서 일한다. 일하다 몰래 와플을 구워 핼리와 무니에게 건넨다. 돈 없이 음식이 생기는 것, 아이 눈에는 그것도 마법이다. 그 마법은 아이들이 버려진 건물에서 불을 낸 날 끝난다. 애슐리는 아들을 무니와 못 놀게 하고, 와플도 끊긴다. 어른의 마법은 조건이 있다. 조건이 깨지면 사라진다. 아이의 마법에는 조건이 없다. 쓰러진 나무는 다음 날도 쓰러져 있고, 그래서 다음 날도 기지다.
그러니 아이의 마법과 어른의 마법은 방향이 반대다. 아이는 보이는 것 위에 무언가를 덧그린다. 어른은 보이는 것 앞에 무언가를 세워 가린다. 둘 다 사전의 뜻과는 다르다. 사전은 힘을 말하는데, 이 영화의 마법은 힘이 없는 사람이 쓰는 기술이다. 힘이 있으면 쓰지 않는다. 방을 옮기면 되고 집을 사면 된다. 마법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의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정말 모를까. 영화 중반에 무니가 이런 말을 한다. 「난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바로 알아.」 이 말이 나를 오래 붙들었다. 욕조 안의 아이는 바깥을 모른다고 나는 앞에서 적었다. 이 대사는 그 문장을 흔든다. 아이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말하지 않는 쪽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핼리의 마법은 아이를 속인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합의한 것이다. 둘이 같이 안 보기로 한 것. 여기서 내 해석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여섯 살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영화는 끝까지 확정해 주지 않는다. 확정하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방식이므로 나도 확정하지 않고, 확정하지 않으므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결말을 말한다. 핼리가 하는 일이 알려지고, 아동가족국 직원들이 무니를 데려가러 모텔에 온다. 무니는 도망친다. 잰시의 방 앞까지 뛰어가 문이 열리자 울음을 터뜨리고,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말을 겨우 꺼낸다. 그러자 잰시가 손을 잡는다. 둘은 달린다. 모텔을 벗어나 건너편 왕국으로, 사람들 사이를 뚫고 성 앞까지. 이 장면부터 화면이 바뀐다. 나머지 영화는 필름으로 찍었고 이 장면만 휴대전화로 찍었다고 한다. 음악도 이때 처음으로 크게 깔린다. 두 시간 가까이 음악이 없던 영화에서다.
여기서 두 마법이 만난다. 아이들은 입장권 없이 왕국에 들어간다. 사전의 마법,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힘이 처음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화질이 떨어지고 화면이 흔들린다. 영화는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말하지 않는다. 감독은 행복한 결말을 원한다면 아이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찍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결말에서 작동하는 것은 결국 아이의 마법이다. 있는 것을 다르게 보는 힘. 거기에 왕국의 음악이 빌려 입혀진 것뿐이다.
사전의 마법은 끝내 이 영화에 오지 않는다. 호박은 마차가 되지 않았고 아이는 데려가진다. 남는 것은 두 아이가 손을 잡고 달리는 흐릿한 몇 초다. 그걸 마법이라 부를 수 있는가. 나는 부를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사전의 뜻으로는 아니다.
쓰러진 나무로 돌아간다. 무니는 그 나무가 쓰러졌는데도 자란다고 했다. 나무는 자기가 쓰러진 것을 모르지 않는다. 쓰러진 채로 자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법은 그 문장과 같다. 없는 것을 있게 하지 않는다. 쓰러진 것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쓰러진 채로 자라게 둔다.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면 너무 쉽다. 나는 그냥 마법이라 부르고, 그 말의 뜻을 하나 고쳐 쓰는 데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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