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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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좀 해 주고 죽지

삐뚜름관람· 2026. 10. 12.· 2,964자

먼저 밝혀 두자면 나는 겁이 많다. 밤에 집에서 뭐가 쿵 하면 확인하러 가는 게 아니라 이불을 끌어 올린다. 누가 나한테 호신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 그 성의가 부담스러워서 도망칠 거다. 그런 주제에 사람 때리고 쏘는 드라마는 또 열심히 본다.

아무튼 2024년에 나온 이 여덟 편짜리를 봤다. 삼촌이 조카를 혼자 키웠는데, 그 삼촌이 1화에서 죽는다. 자살로 정리된다. 남은 조카는 집에서 냉장고 뒤에 엎드려 총알을 피한다. 알고 보니 삼촌은 집 지하에서 무기를 팔고 있었다. 농기구 파는 인터넷 가게인 척하면서. 그게 1화에서 다 벌어진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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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아저씨는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죽은 사람이 된다. 그런데 여덟 편 내내 나온다. 전부 지나간 시간의 장면이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대본인지 아는가. 결과를 다 아는 상태로 처음부터 다시 연기하라는 거다. 시험 점수를 먼저 받아 놓고 그 시험을 다시 보라는 거랑 비슷하다.

이런 자리에서 사람은 괜히 뭘 하게 된다. 나라면 그랬을 거다. 조카를 볼 때마다 눈에 물기를 좀 넣고, 돌아설 때 한 박자 멈추고, 창밖을 길게 본다. '이 사람 곧 죽습니다' 하고 미리 알려 주는 연기다. 그러면 보는 사람이 알아차려 주니까 마음이 편하다. 나는 그 편한 쪽을 택할 사람이다.

그런데 이 배우는 그걸 안 한다. 여덟 편 동안 표정이 거의 하나다. 웃는 얼굴을 거의 안 보여 준다. 용병이던 시절 장면에서 총을 들고 조준할 때도 눈만 뜨고 있다. 힘주지 않고 그냥 겨눈다. 나는 이게 얄밉다. 안 보여 주는데 전달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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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좋았던 건 아이를 안고 걸어 나오는 장면이다. 환자복을 입은 아이를 품에 안고 복도를 지나간다. 여기서 보통은 품에 안긴 애를 한 번 내려다본다. 내가 널 지킨다는 걸 보여 줘야 하니까. 이 배우는 안 내려다본다. 애는 안은 채로 뒤를 본다. 쫓아오는 게 없는지부터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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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돌아보는 방향에서 졌다. 애를 보는 사람이랑 애 뒤를 보는 사람은 다르다. 애를 보는 건 마음이고 뒤를 보는 건 일이다. 이 아저씨는 일하는 쪽을 골랐다. 그 한 번의 방향 때문에 나중에 그가 조카한테 총 쏘는 법이랑 무에타이를 가르친 게 전부 말이 된다. 사랑한다는 말은 끝까지 안 한다. 입버릇은 "잘 들어, 지안" 이거 하나다.

쫓아오는 쪽도 만만치 않다. 옛날에 같이 일했다는 저격수가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은 반대로 간다. 총을 겨누면서 웃는다. 눈이 좁아지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사람 쏘러 와서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다. 무서운 건 총이 아니라 그 얼굴이다. 즐거워하는 사람은 멈출 이유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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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아오는 사람 중에는 맨손이든 총이든 칼이든 다 된다는 킬러도 하나 있다. 이 역을 한 배우는 몸무게를 3킬로그램 늘리고 체력을 키웠다고 한다. 나는 그 대목에서 좀 억울했다. 나는 3킬로그램을 빼는 것도 못 해서 작년부터 같은 말만 하고 있다. 누구는 역할 때문에 찌우고 누구는 떡볶이 때문에 찐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

조카 쪽도 말을 해야겠다. 어릴 때 철망 앞에서 주먹을 올리고 서 있는 장면이 있는데, 애 얼굴에 비장함이 없다. 그냥 시키니까 하는 얼굴이다. 커서는 소파 뒤에 엎드려 조준경 달린 총을 겨눈다. 이것도 비장하지 않다. 이 배우는 석 달 전부터 총 쏘는 연습이랑 무에타이를 배웠다고 하는데, 배운 티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배운 티를 안 내는 게 제일 어려운 거다. 학원 오래 다닌 사람이 제일 먼저 하는 게 학원 다닌 티 내는 거 아닌가.

이 드라마에는 돈 쓴 티가 나는 것들도 나온다. 총 쏘는 드론이 날아다니고 폭탄도 터진다. 짐승 한 마리는 컴퓨터로 만든 티가 좀 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건 별로 안 남았다. 남은 건 사람이 사람을 쳐다보는 각도 같은 거다. 돈으로 못 사는 게 그쪽이라서 그런가 싶다.

삼촌이 조카를 가르치는 방식도 좀 그렇다. 둘이 나란히 앉아서 액션 영화를 본다. 그러면서 사람 눈에 안 보이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려 준다. 보통 어른은 이럴 때 영화를 끄고 애를 앉혀 놓고 설명한다. 이 삼촌은 영화를 끄지 않는다. 그냥 보면서 말한다. 나중에 조카가 그걸로 살아남는 걸 보면, 저 집에서는 저게 숙제 봐 주는 거였구나 싶다.

고약한 건 제일 가까운 데서 온다.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찾아온 애가 있다. 컴퓨터를 잘 만지는 애다. 삼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으로 몰린 게 그 애가 꾸민 일 때문이었다. 조카를 살리려고 그랬다는 말까지 붙는다. 그 말이 더 싫었다. 좋은 뜻으로 사람 망치는 쪽이 제일 상대하기 어렵다.

이 드라마는 같은 장면을 나중에 다시 보여 주는 걸 좋아한다. 처음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니던 말이 두 번째에는 다르게 들린다. 그러니까 배우는 그 장면을 두 가지로 동시에 연기해 둔 셈이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그냥 삼촌으로, 다 알고 다시 보는 사람한테는 작별 인사하는 사람으로. 그걸 한 번에 해 놓으려면 결국 아무것도 세게 하면 안 된다. 세게 해 두면 두 번째에 들통나니까. 안 하는 쪽을 고른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 같다.

친구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래서 재밌어?" 하고 묻더라. 나는 답을 제대로 못 했다. 재밌다고 하기엔 중간에 과거로 갔다 더 먼 과거로 갔다 하는 통에 몇 번 멈추고 되감았고, 재미없다고 하기엔 여덟 편을 이틀에 다 봤다. 결국 "삼촌이 애를 안 쳐다보고 뒤를 보는 장면이 있는데" 하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친구는 "그게 뭔데" 했다. 그러게. 그게 뭔데.

끝에 가면 죽은 줄 알았던 삼촌이 살아서 돌아온다. 문으로 들어오면서 웃고, 조카도 웃는다. 여기서도 그는 길게 사과하지 않는다. 미안하다고 설명하지도 않는다. 설명 좀 해 주고 죽지, 설명 좀 해 주고 살아 오지, 나는 속으로 그랬다. 그러면서도 나처럼 겁 많은 사람은 안다. 설명해 주는 사람보다 뒤를 봐 주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는 걸. 좀 그랬다.

밤에 쿵 소리가 나면 이불부터 뒤집어쓰는 사람들아. 우리 몫의 뒤를 봐 준 누군가가 어딘가엔 있었을 거다. 그 사람도 아마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을 거고. 그래도 오늘은 좀 든든하게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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