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6

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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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끌고 다니는 전설이 어디 있나

삐딱선· 2026. 10. 09.· 1,720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화투 영화로 못 봤다. 자전거 영화로 봤다. 전설의 타짜라는 평경장이 길을 걸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흰 양복을 쫙 빼입고 챙 넓은 모자까지 눌러쓴 사람이 손으로 끌고 가는 게 자전거인 것이다. 빨간 자전거. 핸들에 은색 종 달리고 앞에 가방 하나 매달린, 동네 세탁소에서 옷 배달 나갈 때 끌고 나올 법한 그 자전거. 나는 거기서부터 영화가 안 보이기 시작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저건 그냥 둔 게 아니다, 저건 설정이다, 저 자전거엔 분명 뜻이 있다'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양복은 흰색이고 모자는 챙이 넓고 구두는 반질거리는데 탈것만 자전거다. 이 조합이 성립하려면 이 사람은 멀리 안 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중학교 때 아버지 자전거를 몰래 끌고 나갔다가 체인이 빠져서 삼십 분을 끌고 돌아온 적이 있다. 끌고 가는 자전거가 사람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드는지 나는 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그게 더 이상했다.

전설의 타짜라면 차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검은 세단에서 내려야 하고, 문을 닫으면 쿵 소리가 나야 하고, 그래야 뒤에 오는 사람이 긴장하지 않나. 나는 진지하게 가방 안이 궁금했다. 저기 화투가 들었을까, 아니면 장 봐 온 콩나물이 들었을까. (영화 보면서 남의 짐가방 속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나다. 고칠 생각은 없다.) 영화는 당연히 안 알려 준다. 안 알려 주니까 나는 더 궁금해졌다.

타짜 스틸컷

그다음부터는 이 사람이 하는 말을 전부 자전거 속도로 듣게 됐다. 평경장은 고니에게 "손은 눈보다 빠르다"고 말한다.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게 좀 웃겼다. 빠르다는 걸 자랑하는 말치고는 비교 대상이 너무 가깝지 않나. 손이 눈보다 빠르다는 건 결국 자기 몸 안에서 끝나는 경주다. 바깥의 누구와도 겨루지 않는 속도. 속담계의 자가발전 같은 문장인 것이다. 그런데 자꾸 생각하니까 안 웃겼다. 자기 몸 안에서만 빠른 사람, 그게 자전거 끌고 다니는 사람의 속도와 정확히 같았기 때문이다.

이 아저씨가 고니에게 가르치는 말은 거의 다 줄이는 말이다. "욕심 부리지 마라."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기술 쓰지 말라는 소리를 더 많이 한다. 밤에 라이터를 켜서 그 작은 불로 남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는데, 불이 딱 손바닥만 하다. 그만큼만 밝히고 그만큼만 본다. 나는 이 사람이 젊었을 때는 차도 몰고 판도 크게 벌였다가 어느 날 다 접고 자전거로 갈아탄 사람일 거라고 혼자 정해 버렸다. (영화에 그런 장면은 없다. 없는데 나는 봤다.)

타짜 스틸컷

그래서 기차가 나왔을 때 나는 좀 이상한 기분이 됐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모자를 쓴 아저씨가 객차 통로에 서 있다. 좌석 번호가 붙은 문 앞이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당한다. 나는 여기서 좀 울었는데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사람이 죽어서 운 것 같지는 않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내가 운 건 그 사람이 하필 기차에 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짜 스틸컷

자전거는 멀리 못 간다. 끌고 가면 더 못 간다. 대신 아무 데서나 내려 세워 둘 수 있고, 아무 때나 방향을 바꿀 수 있고, 무엇보다 혼자 간다. 욕심 부리지 말라는 말은 결국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거리까지만 가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기차는 남이 깐 선로로, 남이 정한 속도로, 내리고 싶을 때 못 내리는 탈것이다. 평생 자전거만 끌던 사람이 딱 한 번 기차에 올라탔고, 그는 그 기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는 베란다에 세워 둔 내 자전거에 바람을 넣었다. 탈 데도 없으면서 최선을 다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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