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호프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나는 복고를 파는 물건이 싫다
나는 복고를 파는 물건이 싫다. 일부러 모서리를 긁어 놓은 가구가 싫다. 새로 짠 나무에 낡은 색을 입혀 놓은 것은 더 싫다. 빈티지라는 이름표가 붙어서 값이 올라간 것은 참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인위적인 낡음은 거짓말이다. 낡음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도 다르지 않다. 복고를 앞세운 영화는 대개 옛날 물건을 진열대에 올려 둔다. 그리고 관객이 알아봐 주기를 기다린다. 알아보면 반가움이 생기고, 반가움은 판단을 무디게 한다. 나는 그 거래가 싫다. 추억을 담보로 잡고 호감을 빌려 가는 영화는 빌린 것을 끝까지 갚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나는 이미 조금 화가 나 있었다. 감독이 화면 전체에 레트로라는 감각을 심고 싶었다고 말한 것을 읽었기 때문이다. 심고 싶었다는 말. 그런 말 뒤에는 보통 진열대가 따라온다. 그런데 화면이 시작되고 나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이 영화의 낡음에는 이름표가 없다.
호포항이라는 포구가 나온다. 비무장지대에 붙어 있고, 젊은 사람은 빠져나갔고, 남은 것은 노인들이다. 여기서 소가 찢겨 죽고 동네 청년들이 호랑이를 봤다고 한다. 출장소장 범석이 신고를 받고 나간다. 화면 안의 물건은 전부 오래됐다. 각진 순찰차, 지붕 위에서 도는 빨간 경광등, 벽을 타고 아무렇게나 늘어진 전선. 그런데 어느 것도 자기가 오래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다. 나는 거기서 이 영화 편을 들기로 했다.

렌즈 이야기를 해야겠다. 촬영을 맡은 사람이 안 써 본 렌즈를 쓰고 싶다며 빈티지 렌즈를 가져왔다고 한다. 주로 10밀리미터와 20밀리미터 와이드를 썼다고 했다. 나는 이 선택이 마음에 든다. 넓은 렌즈는 많이 담는다. 많이 담으면 하나를 골라 들이밀 수가 없다. 고를 수 없으면 진열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복고는 상품이 아니라 공기다. 공기에는 가격표를 붙이지 못한다.
저쪽에서 온 것들의 생김새도 같은 원칙 위에 있다. 감독은 그 형상을 처음에 직접 그렸고, 타블로이드에 실린 외계인 사진 같은 레트로함에 리얼함을 넣으려 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 문장에서 멈췄다. 싸구려 주간지 1면에 흐릿하게 박혀 있던 그 사진들. 그것은 누구의 추억도 아니다. 그냥 촌스럽다. 촌스러운 것을 가져다 무섭게 만드는 쪽은 멋있는 것을 가져다 무섭게 만드는 쪽보다 훨씬 어렵다. 요즘 그 어려운 쪽을 고르는 영화가 몇 편이나 되는가.
솔직히 말하자. 이 영화는 길다. 156분이다. 앞의 한 시간은 같은 일을 여러 번 한다. 쫓고, 놓치고, 시신을 보고, 다시 쫓는다. 모르는 채로 끌고 가는 시간을 길게 두는 것이 이 영화의 입장이라는 건 알겠다. 그래도 같은 박자를 네 번 치면 네 번째는 비어 있다. 긴장은 쌓이면 올라가지만 같은 높이에서 반복되면 그냥 길다.
더 아쉬운 데가 있다. 후반에 저쪽 세계의 사정이 대사로 한꺼번에 풀린다. 두 시간 가까이 입을 다물고 버틴 영화가 거기서 설명을 시작한다. 나는 설명하는 괴물이 싫다. 설명을 듣는 순간 그것은 괴물이 아니라 사연이 된다. 침묵으로 쌓은 것을 말로 허무는 일은 언제나 아깝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이유는 하나다. 이 영화는 아무에게도 영웅의 얼굴을 주지 않는다. 범석은 각성하지 않는다. 미지의 것 앞에서 책임감과 공포 사이에 끼인 채로 조금씩 무너져 간다. 손은 끝까지 떨린다. 떨리는 손으로 사람을 모으고 자리를 나눈다. 그게 전부다. 나는 그 얼굴이 좋다.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은 길다. 연민을 구걸하는 클로즈업. 느려지는 음악.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 죽기 직전에 길어지는 대사. 희생을 결심하는 얼굴의 정면 쇼트. 살아남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이름을 부르는 장면. 이 영화에는 그게 없다. 사람들은 대체로 황급히 죽고, 죽은 뒤에는 아무도 그들을 위해 멈추지 않는다.
품위란 질 것을 알면서도 자세를 바꾸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의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동네 사람처럼 군다. 겁에 질린 채로 상스러운 농담을 주고받고, 서로 핀잔을 주고, 그러다 총을 든다. 감독은 대중적인 재미를 위해 웃긴 장면을 일부러 넣었다고 밝혔다.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인데 나는 설계로 읽었다. (물론 나는 겁에 질린 사람이 욕을 하지 않는 영화를 신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제 물건 하나를 판정하겠다. 범석이 입은 가죽 점퍼다. 경찰 제복 위에 걸친 낡은 가죽 점퍼. 어깨에 금색 휘장이 하나 붙어 있고, 기름때와 먼지가 색을 먹어서 원래 검정이었는지 짙은 갈색이었는지 알 수 없다. 허리 벨트에는 열쇠 뭉치가 매달려 달랑거린다. 나는 이 차림이 정확하다고 본다. 이 점퍼는 멋을 내려고 꺼낸 옷이 아니라 오래 같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옷이다. 열쇠 뭉치가 특히 그렇다. 저 열쇠들이 어느 자물쇠에 맞는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 사람 하나뿐이다.

만약 이 영화가 범석에게 방탄조끼를 입히고 전술 장갑을 끼웠다면 나는 이 영화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점퍼를 벗기는 순간 그는 동네 사람이 아니라 투입된 인력이 된다. 좋은 의상은 대사를 줄인다. 저 점퍼는 열 줄쯤 지웠다.
결말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지만 아끼지 않겠다. 이 모든 일의 시작에는 사람의 손이 있었다. 산에서 아이 하나가 죽었고, 사람이 그것을 냉동창고에 숨겼다. 그러니까 먼저 온 것은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었다. 저들이 마을을 뒤진 것도 정복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이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거대한 것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세상이 탄다. 감독은 그 장면을 두고 신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죽었던 아이가 돌아온다. 제목이 거기서 완성된다. 나는 이 결말이 전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부활은 언제나 조금 너무 쉬운 카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카드를 쓰면서도 위로를 나눠 주지 않는다. 마을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온 것은 저쪽의 아이 하나다. 이 인색함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길다. 늘어진다. 끝에 가서 말이 많아진다. 좋다. 이 네 가지는 모순이 아니다. 한 영화 안에 전부 들어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영화의 낡은 화면을 오래 생각했다. 긁어서 만든 낡음이 아니라 쌓여서 생긴 낡음. 저 가죽 점퍼는 어느 진열대에도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 점퍼를 믿는다.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