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1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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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묻은 채로 싸우는 영화

밤선율· 2026. 10. 27.· 2,519자

싫은 것

한 컷부터. 사막에서 한 무리가 걷는다. 바람이 분다. 실제 모래폭풍이다. 강풍기 백 대를 돌려도 이렇게는 안 나온다는 스태프 말에 감독이 그냥 찍었다고 한다. 배우들 얼굴에 모래가 박혀 있다. 나는 이 컷에서 이 영화를 믿기로 했다. 믿은 이유를 말하려면 먼저 싫은 것을 말해야 한다.

나는 깨끗한 전쟁 사극이 싫다. 목록을 적는다.

  • 사흘 걸었는데 다려 입은 것 같은 옷
  • 줄에 매달려 날아다니는 칼싸움
  • 협상 대신 고함만 지르는 적장
  • 구출된 공주를 사이에 두고 자동으로 갈라지는 남자들
  • 죽기 직전에 나오는 명분 연설
  • 살아남은 한 사람이 고향에 닿아 눈물짓는 마지막 장면

여섯 개다. 이 중 넷을 피하고 둘을 저지르면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좋았다고 말한다. 그 정도가 내 기준이다.

이 작품

옷부터. 감독은 촬영을 마친 뒤 자기 무사들은 하늘을 나는 중국 무협의 고수도, 당당한 일본 사무라이도 아니라고 말했다. 배우 둘이 다리와 팔을 다치고도 땀에 찌든 옷을 그대로 입고 찍었다는 기사도 있다. 화면에 그대로 나온다. 객잔에 도착할 때 이들은 더럽다. 토성에 도착할 때는 더 더럽다. 다친 몸으로 입은 옷이 다려 입은 옷보다 맞는다. 첫째 항목, 피했다.

먼지 이야기를 하나 더 한다. 사막 장면을 찍으러 간 곳은 기차로 꼬박 스물세 시간, 말 쉰 마리는 나흘을 서서 갔고, 낮에는 오십 도까지 올랐다는 제작 기록이 있다. 그 숫자가 화면에 보이느냐고 묻는다면, 보인다. 객잔에 늦게 도착한 여솔이 죽은 주인의 시체를 끌고 들어오는 장면에서 그는 사막을 통째로 묻히고 들어온다. 색목인이 그 시체에 침을 뱉자 단칼에 베는데, 나는 그 칼보다 그 먼지가 먼저 납득됐다. 먼지가 납득되면 칼은 따라온다.

칼싸움. 무술감독은 와이어는 불가능하고 홍콩을 따라잡을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바닥에서 싸운다. 창잡이 여솔의 동작은 불 끈 체육관에서 눈 감고 만들었다는 동작이고, 배우가 대부분 직접 했다. 창이 중국식이라는 지적은 있다. 그건 맞는 지적이고, 그래도 땅에 발이 붙어 있는 창은 공중에 뜬 창보다 낫다. 토성 전투에서 대나무 사다리를 타고 오르며 싸우는 장면은 군대에서 높은 벽을 넘던 기술에서 왔다고 한다. 둘째 항목, 피했다.

덧붙이면 활도 있다. 늙은 대정 진립이 사막 비탈을 내려오며 활을 쏘는 장면은 감독이 될 때까지 다시 시켰다고 했고, 배우가 밤새 연습했다고 했다. 줄에 매달려 날면 한 번에 끝날 일을 사람이 될 때까지 했다는 뜻이다. 그 차이가 화면에서 보인다. 안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과는 영화 이야기를 오래 하지 않는다.

적장. 탐불화는 토성을 포위하고 사람을 보내 말한다. 공주만 내주면 전원 살려 보낸다, 고려가 명나라 눈치 보느라 우리와 못 어울리는 사정도 안다. 이게 협상이다. 고함이 아니다. 여솔이 그 사신의 목을 베자 그는 화내는 대신 여솔을 생포하고, 붙잡은 뒤에는 칼을 쥐게 해 주라고 명령한다. 이해가 안 가는 결정이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적장이 고함만 지르는 적장보다 백 배 낫다. 셋째 항목, 피했다.

무사 포스터

여기서부터 저지른 것이다. 공주를 두고 여솔과 최정이 부딪친다. 자료마다 그렇게 적혀 있고 화면에서도 그렇게 보인다. 마차에서 피로 쓴 「救」 한 글자가 떨어졌을 때 이 영화는 이미 그 길로 들어섰다. 공주가 구출되면 남자 둘이 공주를 사이에 두고 갈라진다는 관습, 넷째 항목, 저질렀다. 더 나쁜 건 그 관습이 전투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여솔이 성벽의 자기 자리를 비우고 공주에게 달려간 틈으로 몽골군이 들어오고 피난민이 떼로 죽는다. 공주를 지키려다 공주 아닌 사람들을 죽게 한 것이다. 영화는 이것을 알고 있다. 공주가 그 원망을 못 견디고 성을 나가는 장면이 있으니까. 알면서 저질렀다. 그게 더 삐딱하게 보인다.

명분 연설. 최정은 끝에 가서 명예롭게 죽고 싶었다고 말한다. 다섯째 항목, 저질렀다. 다만 짧다. 한 줄이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 하는 건 연설이 아니라 진립과 눈을 맞추는 일이다. 연설 뒤에 침묵이 오면 연설은 반쯤 무효가 된다. 반만 저질렀다고 치겠다.

마지막 장면. 살아남은 사람은 진립 하나다. 영화는 그가 고향에 닿는 걸 보여 주지 않는다. 동료들을 태우고, 유품을 부러진 창날에 묶어 뱃머리에 꽂고, 한족 피난민이 만들어 준 나룻배에 오른다. 공주가 그 배로는 바다를 못 건넌다고 말하고, 그는 그래도 가야 한다고 답한다. 끝. 눈물짓는 귀향 장면이 없다. 여섯째 항목, 피했다.

넷 피하고 하나 저지르고 하나는 반. 내 기준은 넘었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며 나는 세 번쯤 지루했다. 사막 행군이 길다. 두 시간 반이 넘는 러닝타임에 아홉 명을 다 세우려니 그럴 수밖에 없다. 네 시간 분량에서 두 시간 삼십오 분으로 줄였다는 말이 당시에 돌았고, 감독은 처음부터 두 시간 이십 분 정도로 기획했다고 답했다. 어느 쪽이든 잘린 자리가 보인다. 토성에 닿기 전 어디쯤에서 나는 시계를 봤다.

지루하다. 좋다. 모순이 아니다. 먼지 묻은 옷으로 두 시간 반을 버티는 영화는 지루할 권리가 있고, 깨끗한 옷으로 두 시간을 날아다니는 영화는 재미있어도 용서가 안 된다. 나는 후자를 더 오래 미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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