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6
사랑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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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말과 식구라는 말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과 식구가 되겠다는 말을 자주 한자리에 놓는다. 두 말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두 말이 떠맡는 것의 크기는 같지 않다. 앞의 말은 내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알리는 말이고, 뒤의 말은 상대의 살림과 빚과 아픈 사람까지 내 쪽으로 옮겨 오겠다는 말이다. 고백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약속은 혼자서는 지킬 수 없다. 둘은 다르다.
주말 저녁 여덟 시에 나가는 이야기가 이 구분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나는 오래 회의적인 쪽이었다. 그 자리의 드라마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쓰고, 식구가 되겠다는 말은 마지막 회까지 아껴 두는 편이기 때문이다. 아껴 두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식구가 되겠다는 말을 일찍 꺼내 놓으면 남은 회차를 버틸 거리가 줄어든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순서를 바꿔 놓았다. 나는 이 드라마가 그 일을 생각보다 정교하게 해냈다고 생각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적어 보려 한다. 이경희가 쓰고 홍석구가 연출한 쉰 회 안팎의 주말극이고, 지금 열아홉 회까지 나왔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하는 김무진(하석진)과 반찬가게에서 일하는 한규림(안희연)은 팔 년 전에 헤어진 연인이다. 규림에게는 한결이라는 아이가 있고,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는 두 사람 모두 이미 알고 있다. 규림의 집에는 일을 벌이는 아버지 한석중(류승수)과 셈이 빠른 동생 한규영(박유나), 그리고 팔 년 동안 사기를 당해 온 막내 한규오(배윤규)가 있다. 집이 기울었을 때 대학을 접고 동생들을 떠맡은 쪽이 규림이었다. 서른셋이 된 지금도 이 여자의 하루는 반찬가게 일과 집안일로 빈틈없이 이어져 있다. 그 사이로 무진이 다시 들어온다.

질문은 이것이다. 무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고백인가, 약속인가. 이 물음이 말장난이 아닌 까닭은, 규림이 거절하는 이유가 정확히 거기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규림은 무진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규림이 의심하는 것은 그 마음이 떠맡게 될 것들의 목록이다. 미혼모라는 자기 처지를 먼저 꺼내 놓은 뒤에 선을 긋는 쪽은 언제나 규림이다. 나는 이 거절이 사랑의 거절이 아니라 약속의 거절이라고 읽었다.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이 드라마는 고백의 자리를 옮겼다. 고백은 보통 두 사람만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그래서 고백을 들은 사람은 그것을 혼자 간직하거나 혼자 물릴 수 있다. 둘만 아는 말은 둘만의 힘으로 없앨 수 있다는 뜻이다. 열여덟 회에서 무진은 규림의 집에 들어가 식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규림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말한다. 둘만의 방에서 나왔다면 고백이었을 문장이, 그 집 거실에서 나오는 순간 성격을 바꾼다. 그것은 고백이라기보다 신고에 가깝다. 신고는 취소하기가 어렵다.
둘째, 이 드라마는 그 신고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간다. 같은 회차에서 무진은 사기를 당해 온 규오를 찾아가 자기를 소개한다. "안녕 오늘부터 네 형이 된 김무진이라고 해." 이 문장에는 좋아한다는 말이 한 번도 들어 있지 않다. 그 대신 호칭이 들어 있다. 호칭은 마음의 보고가 아니라 자리의 선언이고, 자리를 선언한 사람은 그 자리에 딸린 일을 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곧 규오를 등쳐 온 사람을 찾아가, 다시 손을 대면 사는 쪽이 죽는 쪽보다 괴로워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형이라는 말을 꺼낸 입과 그 경고를 하는 입이 같다는 것, 나는 그것이 이 드라마가 식구라는 낱말을 다루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은 앞의 고백보다 무겁다.
물론 이것을 가진 사람이 기운 집을 떠맡는 이야기, 그러니까 구원의 서사라고 말할 수도 있다. 레스토랑을 가진 남자와 반찬가게에서 일하는 여자를 나란히 세워 놓았으니 그 혐의는 처음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아직 그 길로 가지 않았다. 열아홉 회의 출근길에서 규림은 무진을 세워 둔 채 자기는 그에게 가지 않겠다고,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냥 지나간다. 구원의 서사였다면 여기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 드라마가 지금까지 지켜 온 것은 받지 않을 권리다. 그 권리를 쥔 쪽이 가난한 쪽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열아홉 회의 다른 대목 하나를 다시 읽고 싶다. 규림이 동생 규영에게 엄마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 집의 친어머니 고윤희(윤유선)는 오래전에 집을 떠나 다른 집의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규림의 그 말에 흔한 이름을 붙이자면 상처라고, 버려진 아이의 원망이라고 부르면 될 것이다. 틀린 데는 없지만 정확하지도 않다.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식구라는 말을 스스로 거둬들이는 일이다. 규림은 지금 자기에게 식구를 늘릴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중이고, 그러니 무진의 선언과 규림의 그 문장은 같은 낱말을 놓고 벌이는 다툼인 셈이다. 한쪽은 식구를 늘리려 하고 다른 한쪽은 식구를 줄이려 한다.
이 드라마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 식구가 되겠다는 말로 건너가는 자리에는 반드시 한 번의 모욕이 끼어든다는 사실이다. 떠맡겠다는 쪽은 자기가 베푼다고 여기지 않으려 애쓰고, 떠맡겨지는 쪽은 그래도 자기가 짐이 되었다고 느낀다. 그 느낌을 없애 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그 자리를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보려고 나는 이 이야기를 계속 보게 될 것 같다. 고백은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약속은 받아 주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한다. 아직 받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이 드라마의 가장 믿음직한 대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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