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6

사랑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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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당하는 법

삐딱하게보기· 2026. 10. 10.· 2,114자

고백하건대 나는 거절당하는 장면을 몹시 좋아한다. 받아들여지는 장면은 길어야 삼십 초면 끝나지만, 거절은 두 사람이 서로의 품위를 지켜 주면서도 끝내 물러서지 않아야 하는 까닭에 공이 훨씬 많이 든다. 쓰는 쪽에는 고역이고 보는 쪽에는 호사다. 그래서 거절 장면이 잘 빠진 작품을 만나면 나는 그 대목을 두 번 돌려 보는 버릇이 있다.

이 드라마는 제목에서부터 관객과 계약을 맺는다. 사랑이 온다고 했지 사랑을 데리러 간다고 하지 않았다. 이쪽에서 애쓰지 않아도 저쪽에서 걸어온다는 약속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 여덟 시라는 자리 역시 계약서의 조항에 속한다. 쉰 회 안팎의 분량 동안 두 사람을 붙였다 떼었다 하겠다는 뜻이니, 관객은 그 조건을 알고 도장을 찍는 셈이다. 이런 계약서는 대개 성실하게, 그리고 지루하게 이행된다. 붙이는 데 한 회, 떼는 데 한 회, 그 사이에 식구들이 끼어들어 한 회. 이쯤은 주말극을 써 본 사람이라면 자다가도 쓴다.

열아홉 회의 출근길 대목은 그 계약을 조금 비틀어 이행한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하는 김무진(하석진)이 반찬가게로 나가는 한규림(안희연)을 길목에서 붙잡는다. 손에 든 것은 꽃도 반지도 아니고 코코아다. 여자가 "나도 코코아 사 먹을 돈은 있어"라고 받아치자 남자는 "그럼 이거 혼자 다 먹고 혈당 스파이크 걸리면 책임질래"라고 되묻는다. 구애의 자리에 혈당을 끌어들이는 배짱이 자못 뻔뻔하다. 나는 그런 종류의 뻔뻔함을 사랑한다.

사랑이 온다 스틸컷

그런데 이 장면에서 더 좋은 솜씨를 부린 쪽은 거절하는 여자다. 이 여자는 화를 내지 않고, 울지도 않고,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도 않는다. 자기는 그에게 가지 않겠다고,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못 박고 그냥 걸어간다. 거절하는 인물의 입에 구구절절한 사연을 물려 주고 싶은 유혹은 필경 쓰는 사람 누구에게나 있을 터인데, 여기서는 그 유혹을 참았다. 참은 자리가 비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침묵을 얼굴로 메우는 배우가 있기 때문이다. 거절은 짧을수록 비싸진다.

이제 코코아를 좀 뜯어보자. 이 남자는 제 가게를 가진 셰프다. 마음만 먹으면 접시에 무엇이든 담아 들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가 들고 나온 것은 제 주방에서 만든 요리가 아니라 길에서 사 온 음료 한 잔이다. 요리를 들고 나왔다면 그것은 구애가 아니라 영업이 되었을 것이고, 여자는 접시를 받는 순간 빚을 지게 되었을 것이다. 사 온 코코아는 값이 싸고, 금방 식고, 받아도 갚을 것이 없다. 거절할 여지를 남겨 둔 선물인 셈이다. 소품 하나를 이만큼 재서 고르는 손이라면 나머지도 믿어 줄 만하다. 나는 그 계산에 감탄하다가 조금 분해졌다.

사랑이 온다 포스터

불만도 하나 적어 두어야 공평하겠다. 열여덟 회에는 친어머니 고윤희(윤유선)가 딸이 일하는 반찬가게에 손수 싼 도시락을 들고 찾아오는 대목이 있다. 딸이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이 장면의 전제인데, 그 전제를 혼자 떠받치는 물건이 고작 선글라스 하나다. 가게 주인이 뒤늦게 그 여자가 색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느냐고 묻는 데 이르면, 각본이 제 장치의 얄팍함을 스스로 실토하는 꼴이 된다. 오래 헤어져 있던 모녀의 상봉을 안경테 하나에 맡긴 것은 관객을 얕본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정작 그 딸이 전복 반찬에서 유자 맛을 짚어 내 어머니를 알아내는 쪽은 솜씨가 좋았던 터라 더 아깝다.

안희연이 맡은 자리는 손해 보기 쉬운 자리다. 서른셋이고, 반찬가게에서 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고, 동생들이 벌여 놓은 일의 뒷수습까지 떠맡는다. 사연을 이만큼 짊어진 배역은 자칫하면 사연만 남고 사람이 사라진다. 이 배우는 대사가 없는 동안에 가장 많은 일을 한다. 대문 앞에 서서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눈만 옆으로 미는 얼굴 같은 것 말이다. 그것도 아주 조용하게.

계약은 어떻게 닫히는가. 남자는 매일 거절당해도 매일 고백하겠다고, 다시는 놓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사랑이 온다는 제목의 약속을 제 발로 걸어가 떠맡아 버린 것이다. 오는 쪽이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계약서를 고쳐 써야 할 판인데, 이 드라마는 그 수정을 아직 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다. 버티는 동안에는 거절이 계속 나올 것이고, 그렇다면 나로서는 불만이 없다. 모름지기 구애란 식은 코코아를 들고 같은 길목에 매일 서 있는 일이지, 한 번에 끝을 보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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