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4
트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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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있는 쪽과 배가 있는 쪽
천 척의 배. 이 영화가 내세우는 숫자는 이것이다. 기원전 1184년의 이야기로 설정돼 있고, 그리스 연합군의 배가 바다를 덮으며 트로이 앞바다로 들어오는 장면이 그 숫자를 보여 준다. 그런데 나는 배의 수보다 배가 닿는 자리가 궁금했다. 배가 서는 곳이 해변이고, 해변 뒤가 평야이고, 평야 끝이 성벽이다. 163분짜리 영화의 거의 전부가 이 세 토막 안에서 벌어진다.
왜 이 영화는 신을 뺐을까? 원작 서사시에서는 신들이 전장에 직접 내려오는데, 영화에는 신이 끼어드는 장면이 없다. 신을 빼면 운명을 대신할 것이 필요하다. 내 가설은 이렇다. 이 영화에서 운명의 자리를 맡은 것은 지형이다. 누가 바다 쪽에 있고 누가 벽 안에 있는지가 그 사람의 운명이다. 절반만 맞다. 나머지 절반은 아래에서 하나씩 되물어 보겠다.
공간 1 · 해변
그리스군은 해변에 산다. 배를 끌어 올려 놓고 그 옆에 천막을 친다. 영화는 이 진영을 금방 떠날 사람들의 자리처럼 찍는다. 집이 아니라 짐이다. 상륙 장면이 그 성격을 정한다. 아킬레스는 자기 배를 다른 배보다 앞세워 곧장 아폴론 신전이 있는 언덕 쪽으로 댄다. 해변에는 나무 말뚝이 박혀 있고, 그는 모래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며 싸운다. 신전에 다다라 신상의 목을 베고, 부하가 신의 노여움을 걱정하자 보란 듯이 기다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변에서 가장 높은 자리가 신의 집이었는데, 그 집이 하루 만에 사람의 자리가 된다.
해변에서 중요한 것은 거리다. 아킬레스의 막사는 다른 부대와 떨어진 자리에 있다. 아가멤논의 막사까지 걸어가야 할 만큼. 일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셋 있다. 사무실에서 상사와 가장 멀리 앉은 사람, 회식 자리에서 문 가까이 앉은 사람, 가족 모임에 늦게 와서 끝자리에 앉는 사촌. 떨어져 앉은 사람은 명령을 받는 사람이 아니다.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가는 일, 아킬레스가 싸움에서 손을 떼는 일이 모두 그 거리 안에서 벌어진다. 그러니 해변의 자리 배치가 두 사람의 사이를 만들었다고 하면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 거리를 벌려 놓은 것은 아킬레스 자신이기도 하다. 떨어져 앉기를 택한 사람이 떨어진 자리 때문에 밀려났다고 말하면 순서가 뒤집힌다.

공간 2 · 성벽
트로이는 벽이다. 높은 성벽 안에 궁전과 신전과 집이 있고, 벽 앞에 넓은 평야가 있다. 영화는 큰 싸움을 전부 이 평야에서 벌이는데, 그때 카메라가 자꾸 벽 위로 올라간다. 벽 위에는 보는 사람이 있다. 아킬레스와 헥토르가 성문 앞에서 맞붙을 때, 왕과 왕가는 궁전 앞에 마련된 자리에서 그것을 내려다본다. 싸우는 사람은 밖에 있고 보는 사람은 안에 있다. 벽이 하는 일은 적을 막는 것만이 아니다. 자기 사람을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헥토르가 죽은 뒤 아킬레스는 시신을 전차에 묶어 성벽 둘레를 돈다. 벽 위에서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보라고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벽은 두 군데서 지어졌다. 성 안쪽 세트는 몰타의 옛 요새 안에, 바깥 성벽은 멕시코 해안에 따로 세웠고, 촬영 중 허리케인이 멕시코 세트를 쳤다고 한다. 화면에서 하나로 보이는 벽이 실제로는 바다 두 개를 건너 이어 붙인 것이다. 영화 속 벽이 안과 밖을 그렇게 단단히 나누는 것과 어울리는 사정이다.
공간으로 보면 이 벽에는 문이 하나뿐이다. 영화 내내 닫혀 있던 문이 마지막에 안에서 열린다. 그리스군이 물러간 자리에 남겨진 목마를 트로이 사람들이 성 안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목마는 매끈한 조각이 아니라 배를 부순 목재로 얼기설기 짠 듯한 거친 모양이다. 해변의 재료가 벽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날 밤에야 우리는 궁전 바깥의 트로이, 골목과 보통 사람들의 집을 길게 본다. 불타는 모습으로. 이 영화가 성 안을 보여 주는 방식은 파괴다. 안이 있었다는 것을 안이 사라지는 순간에 알려 준다.

공간 3 · 막사
해변과 벽 사이의 평야에서 두 진영 사람이 만나는 방법은 하나다. 싸우는 것.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평야가 아니라 천막 안에서 일어난다. 헥토르가 죽은 날 밤, 트로이의 왕이 무장도 호위도 없이 혼자 그리스 진영으로 걸어 들어온다. 아킬레스의 막사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아들을 죽인 손에 입을 맞추고, 아들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한다. 아킬레스는 시신을 내주고, 브리세이스를 함께 돌려보내고, 장례를 치를 수 있게 열이틀의 휴전을 약속한다. 오늘 밤에도 당신은 내 적이지만 적끼리도 예를 갖출 수는 있다는 말이 이 자리에서 나온다.
막사는 벽이 없는 방이다. 천 한 장이다. 왕이 왕으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서, 아버지로 들어온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던 사람이 바닥에 무릎을 대는 순간 영화의 높낮이가 처음으로 뒤집힌다. 여기서 두 번째 가설이 나온다. 벽이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화해가 가능했다. 절반만 맞다. 다음 날에도 전쟁은 그대로이고, 그 왕은 결국 자기 성 안 신전의 제단 앞에서 죽는다. 공간이 사람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날 밤 그 자리에 걸어올 사람이 누구였느냐가 장면을 바꿨다. 천막은 그것을 막지 않았을 뿐이고, 막지 않았다는 것과 만들었다는 것은 다르다.
영화는 다시 해변에서 끝난다. 성은 타고, 아킬레스는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죽고, 오디세우스가 그 시신 앞에서 장작에 불을 붙인다. 시작한 자리에서 끝나는 영화다. 벽은 무너졌고 배는 떠날 것이고, 남는 것은 모래다. 천 척의 배가 닿았던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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