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4

트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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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은 다 받으시고 접시 둘만 물리셨다

예민한책장· 2026. 10. 27.· 3,098자

고대 전쟁 대작을 보시기 전에 종이 한 장 꺼내 수순을 적어 보신 적 있으신지. 나는 이번에 적었다. 샌들 신고 창 든 사람들이 천 척 배를 타고 몰려가는 영화라면 수순이 뻔하기 때문이다. 적어 놓고 세 시간 가까이 맞춰 봤더니, 이 영화는 차려진 밥상을 거의 다 드시고 접시 둘만 정중히 물리신 것이었다. 어느 접시인지는 아래에 적는다.

먼저 내가 적은 수순. 하나, 천 척의 배가 바다를 덮는 장면. 둘, 주인공 영웅이 첫 등장에서 한 방으로 상대를 눕히는 장면. 셋, 전쟁의 원인이 되는 금지된 사랑. 넷, 두 군대 앞에서 벌이는 일대일 결투. 다섯, 영웅이 토라져서 막사에 들어앉는 대목. 여섯, 영웅 대신 나간 친구가 죽고 영웅이 돌아오는 대목. 일곱, 숙적끼리의 최후 결투. 여덟, 목마. 아홉, 발뒤꿈치. 이 아홉이 다 나오면 밥상이 완성되는 것이고, 안 나오면 과연, 하고 감탄하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1. 예상 · 천 척의 배. 실제 · 나온다. 그리스 연합군의 배가 수평선을 메우고 들어오는 장면이 있고, 그 배들 중 하나가 남보다 먼저 해변에 닿는다. 그 배 주인이 누구인지는 보신 분들이 아실 것이다. 접시 하나 비움.
  2. 예상 · 첫 등장 한 방. 실제 · 나온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가멤논이 남의 땅에 가서 마음에 드니 눌러앉겠다고 하고, 양쪽 대표 한 명씩 나와 붙자고 한다. 저쪽은 산만 한 거인이고 이쪽은 아킬레스다. 아킬레스는 막사에서 불려 나와 거인을 한 번 뛰어서 끝내고, 또 없느냐고 묻는다. 수순 중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수순이라 하겠다.
  3. 예상 · 금지된 사랑. 실제 · 나오긴 나온다. 스파르타 왕비가 트로이 왕자를 따라 배에 오르고 전쟁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사랑이 영화를 끌고 가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아가멤논은 헬레네 때문이 아니라 바다를 쥐려고 왔다고 영화가 대놓고 말하고,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로 이야기를 움직이는 일은 거의 없다. 접시는 비웠는데 반찬은 손을 안 댄 꼴이다.
  4. 예상 · 일대일 결투. 실제 · 나온다. 그것도 두 번. 한 번은 아내를 데려간 왕자와 아내를 잃은 왕의 결투인데, 수순대로 가다가 중간에 형이 끼어들어 엉망이 된다. 다른 한 번은 아래에 적는다.
  5. 예상 · 영웅의 토라짐. 실제 · 나온다. 전리품으로 얻은 여사제를 왕이 빼앗아 가자 아킬레스는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막사에 들어앉는다. 원작부터 있는 수순이니 안 나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다만 이 영화의 아킬레스는 토라진 김에 아예 짐을 싸서 집에 가겠다고까지 하는데, 그 결정이 다음 접시를 부른다.
  6. 예상 · 친구의 죽음과 복귀. 실제 · 나온다. 사촌 동생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스의 갑옷과 투구를 쓰고 나갔다가 헥토르에게 죽는다. 부하가 아킬레스에게 보고하는 말이 이렇다. 갑옷도 방패도 투구도 당신 것이었고, 움직임까지 당신 같았다고. 그러고 나서 아킬레스는 혼자 전차를 몰고 성문 앞에 가서 헥토르를 부른다. 수순 그대로이되, 수순을 아는 사람도 숨을 죽이게 찍혀 있다. 이 대목은 구수하다는 말을 붙일 데가 없다.
  7. 예상 · 숙적끼리 최후 결투. 실제 ·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내 수순표가 처음으로 틀렸다. 나는 이 결투를 영화의 마지막에 놓았다. 영화는 이걸 중간쯤에 해치운다. 헥토르가 결투 전에 이긴 쪽이 진 쪽의 장례를 치러 주자고 제안하자 아킬레스는 사자와 사람 사이에 약조는 없다고 답하고, 싸우고, 이기고, 시신을 전차에 묶어 성벽을 돈다. 그리고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꽤 오래 더 간다. 숙적이 죽은 뒤에도 영화가 남아 있다는 것, 이것이 내 밥상에 없던 접시였다.
  8. 예상 · 목마. 실제 · 나온다. 안 나오면 환불 사유다. 오디세우스가 설계하고, 그리스군은 배를 숨기고, 트로이 사람들은 그것을 선물로 알고 성 안에 들인다. 다만 이 영화의 목마는 의외로 빨리 지나간다. 들어오고, 밤이 되고, 문이 열린다. 수순이니까 하는 것이고 수순이니까 길게 안 끄는 것이다.
  9. 예상 · 발뒤꿈치. 실제 · 나온다. 파리스의 화살이 발뒤꿈치에 꽂힌다. 그런데 이어서 가슴에도 몇 대가 더 꽂히고, 아킬레스는 그 화살들을 하나씩 뽑아내고 발뒤꿈치 것만 남긴 채 죽는다. 신화를 아는 분들을 위해 발뒤꿈치 화살만은 남겨 두신 것이다. 전설은 지켜 드린다, 그런 처분으로 읽었다.
트로이 스틸컷

그러니까 아홉 접시 중 여덟은 수순대로 드셨고, 하나는 자리를 옮기셨다. 여기까지는 과연, 소리가 날 일이 아니다. 과연, 소리는 내 수순표에 아예 적지 않았던 곳에서 났다. 나는 「악당은 영웅의 손에 죽는다」를 너무 당연해서 적지 않았다. 이 영화의 아가멤논은 아킬레스의 손에 죽지 않는다. 불타는 성 안에서 브리세이스를 붙잡았다가 그 여사제가 숨겨 둔 칼에 죽는다. 왕 중의 왕이, 영웅과 한 번도 제대로 붙어 보지 못하고, 자기가 전리품으로 취급하던 사람 손에 간다. 아내를 뺏긴 메넬라오스도 마찬가지다. 그런 왕은 보통 끝까지 살아서 아내를 되찾는 것이 수순인데, 이 영화에서는 첫 결투에서 헥토르에게 죽는다. 복수의 당사자 둘이 다 복수를 못 보고 퇴장하는 것이다. 다 차려진 밥상을 물리신 것은 이 두 접시였고, 솔직히 이것 때문에 수순표를 적은 보람이 있었다.

물론 이것이 원작과 다르다는 점은 나중에 찾아보고 알았다. 원작에서는 두 왕 다 전쟁에서는 산다고 한다. 왜 바꿨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세 시간짜리 영화에 왕이 넷이나 살아 돌아가면 뒷정리가 안 돼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냥 두 분이 미우셨을 수도 있다. 아무튼.

트로이 포스터

마지막으로 수순표에 없던 것을 하나 더 적는다. 적장의 늙은 아버지가 밤에 혼자 영웅의 막사로 걸어와 아들 시신을 돌려 달라고 하는 장면이다. 이건 수순이 아니라 원작의 명장면이라 들어 있을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길게 찍어 줄 줄은 몰랐다. 다른 분들이 이미 충분히 쓰셨으니 나는 한 줄만 보탠다. 그 장면에서 아킬레스가 노인에게 당신이 저쪽 군대를 이끄는 왕보다 훨씬 나은 왕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어야 할 당사자는 그때 자기 막사에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 왕에게 일언반구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앞에서 말씀드린 그 칼로 갚는다.

정리하면 이렇다. 수순 아홉을 다 드시고, 수순에 없던 왕 둘을 상에서 치우셨다. 볼까 말까 물으신다면, 수순표를 적고 보셔도 재미있고 안 적고 보셔도 재미있는데, 적고 보시면 두 접시에서 과연 소리가 난다고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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