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4
트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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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을 말하는 쪽이 규칙을 깼다
영웅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들 한다. 명예를 좇는 자와 책임을 지는 자. 이 영화를 두고 떠도는 평은 거의 그 틀로 짜여 있다. 결론부터 적는다. 나는 그 틀이 영화가 실제로 보여 준 것과 어긋난다고 본다.
통념
이 영화에 관해 가장 많이 돌아다니는 평은 이것이다. 헥토르가 영화의 양심이고, 아킬레스는 영화의 삼분의 이 동안 사실상 악역이라는 것. 한 평은 헥토르를 가족과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헌신적인 가장으로, 아킬레스를 감정이 메마른 살인 기계로 읽는다. 다른 평은 두 사람의 결투를 옳음과 힘의 대결이라고 부른다. 신을 뺀 각색을 아쉬워하는 글도 결국 같은 자리로 온다. 신이 없으니 남는 것은 사람의 품성이고, 품성으로 치면 헥토르가 낫다는 것이다.
영화도 그 읽기를 돕는다. 헥토르는 동생이 데려온 여자 때문에 전쟁이 왔다는 것을 알고도 트로이를 위해 싸운다. 얼마나 많은 아내가 돌아오지 않을 남편을 기다리느냐고 묻는 사람도 그다. 자기 규칙을 셋으로 말한다. 신을 공경하라, 자기 여자를 사랑하라, 나라를 지켜라. 아킬레스는 반대편에 선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름이 남는 것이고, 모든 남자가 원하는 것을 자기는 더 많이 원할 뿐이라고 말한다. 신전의 사제를 죽이고, 자기 쪽 왕을 공개된 자리에서 비웃는다. 여기까지는 통념이 성실하다. 영화가 준 것을 그대로 받았다.

내가 본 것
나는 다르게 보았다. 통념이 건너뛰는 장면이 둘 있다.
첫째.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결투다. 아내를 데려간 남자와 아내를 잃은 남자가 두 군대 앞에서 일대일로 맞선다. 파리스는 금방 밀리고, 쓰러져 형의 발 앞까지 기어간다. 그때 헥토르가 끼어들어 메넬라오스를 죽인다. 결투에 끼어드는 것은 결투의 규칙을 깨는 일이다. 규칙을 셋으로 외던 사람이 규칙을 깼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였으므로 이해하고, 이해하므로 통념은 이 장면을 형제의 정으로 읽고, 형제의 정으로 읽으므로 그다음에 벌어진 죽음들이 이 손에서 다시 시작됐다는 것을 잊는다. 그 결투로 전쟁이 끝날 수 있었는지 영화는 확언하지 않는다. 다만 그 뒤로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둘째. 파트로클로스다. 아킬레스가 싸움에서 손을 뗀 사이, 그의 어린 사촌이 그의 갑옷과 투구를 쓰고 전장에 나온다. 헥토르는 그를 아킬레스로 알고 맞서 죽인다. 투구를 벗기자 소년의 얼굴이 나온다. 통념은 이 장면에서 헥토르의 표정을 본다. 나는 소년을 본다. 헥토르는 그 전에 그리스의 거구 아이아스도 죽였다. 아킬레스가 죽인 사람을 세어 그를 악역이라 부른다면 헥토르가 죽인 사람도 세어야 공정하다. 세어 보면 헥토르는 적국 왕의 동생, 적군의 장수, 적장의 어린 사촌을 죽였다. 셋 다 이야기의 매듭이 되는 죽음이다. 아킬레스의 분노는 바로 이 세 번째 죽음에서 온다.
그래서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죽이는 이유를 말하는 방식에 있다. 아킬레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한다. 헥토르는 신과 여자와 나라를 말한다. 전자는 솔직하고 후자는 품위 있다. 그러나 평야에서 쓰러지는 사람의 자리에서 보면 그 차이는 없다. 이름을 위해 들어오는 칼과 나라를 위해 들어오는 칼은 같은 깊이로 들어온다. 통념은 헥토르에게 아내와 아기가 있다는 것을 선함의 증거로 쓴다. 나는 그것을 알리바이로 본다.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그가 하는 일의 성격을 바꾸지 않는다. 그 일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바꿀 뿐이다.

영화가 끝까지 아킬레스를 단죄하지 않는 것을 어떤 평은 어물쩍한 태도라고 비판한다. 나는 그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단죄하지 않거나 둘 다 단죄해야 한다. 한쪽만 영웅으로 올린 것은 영화가 아니라 보는 쪽이 한 일이었다.
내 해석이 틀릴 수 있는 지점을 적어 둔다. 사람은 모순된 채로 선할 수 있다. 결투에 끼어든 형과 세 계명을 말하는 장군이 같은 사람인 것은 위선이 아니라 그냥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헥토르에게 가혹한 것은 영화가 그를 너무 곱게 찍었다는 데 대한 반발일 뿐이고, 반발은 해석이 아니다.
결말을 적는다. 아킬레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트로이는 목마에 열리고, 아킬레스는 파리스의 화살에 발뒤꿈치를 맞고 죽는다. 두 영웅이 다 죽고 도시가 탄 뒤에 살아남는 것은 전쟁을 시작한 두 사람, 파리스와 헬레네다. 영웅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들 한다. 영화의 끝에서 보면 두 종류가 아니라 두 구의 시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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