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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 저도 읽었어요

삐딱선· 2026. 10. 12.· 3,037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책 한 권 때문에 봤다. 영화에 없는 책, 아니 영화에만 있는 책. 「더 데미지」, 하퍼 엘리슨 지음. 세상에 없는 소설이다. 보스턴의 카페에서 엠마가 읽고 있던 책이고, 찰리가 몰래 검색해서 읽은 척한 책이다. 크리스토퍼 보글리가 쓰고 찍고 아리 애스터가 제작한 이 영화는 올해 4월에 미국에서, 9월에 한국에서 개봉했고, 결혼식 일주일 전 커플 이야기라고들 하는데, 나는 한 시간 사십 분 내내 그 책이 어떤 책인지만 궁금했다. 주인공이 누군지, 왜 거울이 나오는지, 그 여자는 결국 죽는지.

첫 만남은 사실 두 번이다. 카페에서 찰리가 말을 걸었는데 엠마가 대답을 안 했다. 무시당한 줄 알고 자리로 돌아갔다가 사과하러 다시 갔더니, 엠마가 한쪽 귀가 안 들려서 못 들었다고, 다시 해 보라고 한다. 그래서 다시 한다. 그리고 첫 데이트 저녁 자리에서 엠마가 묻는다. 결말을 어떻게 봤느냐고, 그 여자 죽은 거냐고. 찰리는 아마 죽었을 거라고 한다. 거울은요. 거울은, 음, 은유 아닐까요. 여기서 내 안의 무언가가 '들킨다, 무조건 들킨다, 안 들키면 내가 가서 이른다' 하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들킨다. 찰리는 책을 안 읽었다고, 그냥 말을 걸고 싶었다고 자백한다. (나도 고등학교 때 안 읽은 책으로 독후감을 쓴 적이 있다. 결말을 틀렸다. 주인공이 안 죽는 책이었다.) 엠마는 그 자백을 받아 준다. 거기서부터 두 사람은 사귄다. 그러니까 이 커플은 첫 문장부터 거짓말로 시작한 커플인 것이다. 그 장면을 잘게 끊어 찍어 놓고 뒤에서 목관악기가 바늘처럼 긁는데, 나는 그 음악이 찰리의 식은땀 소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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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영화가 책 이야기로 갈 줄 알았다. 안 간다. 결혼식 일주일 전, 음식 시식 자리에서 친구 레이첼이 게임을 하자고 한다. 살면서 한 제일 나쁜 짓 말하기. 마이크는 개 앞에서 여자친구를 밀었고, 레이첼은 어릴 때 아이 하나를 가둬 놓고 방치했고, 찰리는 한 아이를 온라인에서 집요하게 괴롭혀서 그 집이 이사를 갔다. 다들 자기 차례에 슬쩍 설명을 붙인다. 엠마는 설명 없이 말한다. 열다섯 살 때 학교에서 총기 난사를 계획했었다고. 하지는 않았다고. 한쪽 귀가 안 들리는 건 태어날 때부터가 아니라 숲에서 총 연습을 하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엠마는 그 뒤로 총기 규제 운동을 하는 사람이 됐다고 한다. 하려던 사람이 막는 사람이 된 건데, 찰리는 그 두 문장 사이를 건너지 못한다. 그 뒤로 영화는 책을 잊는다. 나는 진지하게 걱정했다. 저 책 결말은 이제 누가 알려 주나.

웃기는 대목은 머그컵이다. '커피 안 주면 쏜다' 하는 투의 문구가 찍힌 컵. 그 컵 하나로 싸움이 난다. 농담계의 공용 사이즈 같은 문구다. 아무나 들고 아무 데서나 웃기는, 그런데 딱 한 사람에게는 영영 안 웃긴 문구. 엠마의 고백 뒤로 찰리의 집에서는 그런 것들이 전부 터진다. 결혼식 준비도 따로 굴러간다. 두 사람은 DJ를 누구로 할지로 부딪히고, 그 DJ가 약을 하는 걸 보게 되고, 엠마는 그 DJ에게 정말 시원하게 퍼붓는다. 결혼식 날 대타로 온 DJ는 이 영화에서 제일 웃기는 사람인데, 나는 그 사람이 나올 때마다 혼자 좀 쉬었다. 그리고 여기서 웃음이 멈췄다. 찰리가 결혼식 축사 원고를 고치는 장면. 그는 원고에서 '친절'과 '공감'이라는 낱말을 지운다. 지우개로 사람을 지우는 중이었다. 나는 그 두 단어를 지운 자리에 뭐가 남는지 보려고 화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찰리라는 사람을 좀 보자.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설명하고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게 직업이다. 그런 사람이 설명이 안 되는 애인을 만났다. 그는 웨딩 사진을 미리 찍어 보는 자리에서 열다섯 살의 엠마가 총을 든 모습을 본다. 지금의 엠마 위에 겹쳐서. 그 환각이 여러 번 온다. 청첩장에는 두 사람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붙어 있는데, 찰리의 머릿속 사진첩은 다른 걸 찍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직장 동료 미샤에게 가정을 들어 묻고, 미샤가 위로하는 사이에 입을 맞춘다. 책상에는 「브레인롯」이라는 사진집이 놓인다. 총을 든 여자들 사진집. 그는 엠마를 그 사진 속에 놓아 보고 나서야 다시 엠마를 원한다. 이해가 안 되면 액자에 넣어서라도 이해하려는 사람. (영화에 없는 장면을 나는 하나 봤다. 찰리가 어느 밤 「더 데미지」를 드디어 펴서 거울이 나오는 대목을 읽는 장면. 없다. 없는데 나는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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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 망한다. 들러리 레이첼이 취해서 아픈 말을 축사로 하고, 엠마는 화장실에서 미샤가 하는 말을 엿듣고, 찰리는 축사에서 그 키스를 사과하고, 미샤의 남자친구가 찰리를 때린다. 찰리는 피투성이가 되고 엠마는 조용히 걸어 나간다. 하객 중 누구도 그 커플이 며칠 전에 이미 혼인 서류를 받아 뒀다는 걸 모른다. 그러니까 저 난장판은 서류상으로는 이미 끝난 결혼의 뒤풀이였던 것이다. 나는 그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망할 수 있는 건 식이지 결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식당. 영화 초반에 두 사람이 결혼식 끝나면 가자고 잠깐 말했던 그 식당. 찰리가 먼저 앉아 기다리고, 엠마가 드레스를 입은 채로 들어온다. 둘은 싸우지 않는다. 처음 만난 사람처럼 서로에게 자기소개를 한다. 눈물 묻은 얼굴로 웃는다. 끝. 여기서 좀 울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화해 장면이라서는 아니다. 자기소개라서 그런 것 같다. 이름을 다시 말하는 사람은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척하지 않겠다는 사람이니까.

그 책 얘기를 마저 해야겠다. 찰리는 읽지 않은 책의 결말을 아는 척했다. 그리고 이 년 동안 읽지 않은 사람의 결말을 아는 척했다. 엠마는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그걸로 끝이라고, 다 읽었다고. 「더 데미지」를 안 읽은 건 첫 데이트에서 들켰고, 엠마를 안 읽은 건 결혼식 날 들켰다. 엠마 쪽도 마찬가지다. 태어날 때부터 안 들렸다는 첫 말이 거짓이었으니까. 두 사람 다 첫 장을 건너뛰고 결말부터 아는 척했던 것이다. 식당에서 하는 자기소개는 그래서 화해가 아니라 1쪽이다. 그 소설에서 거울이 뭐였는지 나는 끝내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거울은 은유가 아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다.

집에 와서 책장에서 안 읽은 책 한 권을 꺼내 첫 쪽을 폈다. 첫 쪽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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