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분노의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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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을 나와 도시로 간 싸움

조용한근육맨· 2026. 10. 29.· 2,730자

열네 해. 2011년 9월 토론토의 영화제에서 인도네시아 영화 한 편이 처음 걸렸고, 2025년 9월 같은 도시의 같은 영화제 심야 부문에서 홍콩 영화 한 편이 처음 걸렸다. 앞의 것은 아파트 한 채 안에서 하룻밤 사이에 끝나는 이야기고, 뒤의 것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 동남아의 도시 전체를 돌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앞의 영화에서 경찰 분대장과 미친개를 연기한 두 배우가 뒤의 영화에서 기자와 활잡이로 다시 나온다. 《분노의 추격》을 보면서 《레이드》를 옆에 세워 두지 않기는 어려웠다. 두 영화는 같은 문제를 받아 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시간 가까이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것을 관객이 견디게 하려면 이야기가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 두 영화의 답은 반대다. 앞의 영화에 관한 것은 기사와 평으로 다시 확인해 적었다.

먼저 2011년 영화. 웨일스 출신 감독이 인도네시아에서 찍은 101분짜리 영화다. 자카르타의 낡은 고층 아파트를 마약 조직이 통째로 쥐고 있고, 경찰 특수부대가 그 건물로 들어간다. 작전은 금방 들통나고 부대는 건물 안에 갇힌다. 주인공 라마는 신참이다. 영화가 그에 관해 알려 주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집 나간 형을 찾아 달라고 했다는 것. 그 형은 조직 두목의 오른팔이 되어 있다.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는 이야기를 더 보태지 않기로 했다. 건물 하나, 하룻밤, 층을 올라가는 일. 인물의 과거는 나오지 않고 대사는 짧다. 인도네시아 무술 펜칵 실랏을 바탕으로 싸움을 짰고, 카메라는 손에 들고 따라다녔다. 마지막 싸움은 형제 둘이 조직의 싸움꾼 하나를 상대하는 것이다. 둘이 덤벼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는 데 긴 시간을 쓴다. 한 평은 군더더기 없이 짜릿함만 남긴 영화라고 했고, 다른 평은 인물에 깊이가 없다고 혹평했다. 둘은 같은 것을 보고 한 말이다. 이 영화는 인물을 비워서 싸움을 채웠다.

2025년 영화는 반대로 간다. 사람이 둘이고 잃어버린 사람도 둘이다. 말을 못하는 수리공 왕웨이는 집을 뛰쳐나간 딸 레이니가 눈앞에서 트럭에 실려 가는 것을 본다. 기자 나빈은 아동 인신매매를 취재하던 아내가 돌아오지 않아서, 아이를 사려는 손님인 척 조직에 접근한다. 둘은 조직이 운영하는 격투 클럽에서 처음 마주치고, 서로를 적으로 알고 한바탕 싸운 뒤에야 같은 편이 된다. 영화는 이 둘을 도시 곳곳으로 보낸다. 격투 클럽, 얼음 공장, 아이들을 가둬 둔 낡은 건물, 그리고 경찰서. 한 평자는 앞의 영화가 수직으로 올라갔다면 이 영화는 도시에 수평으로 퍼져 있다고 적었는데 정확한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야기를 비우지 않는다. 경찰서장은 조직과 손잡고 있고, 조직의 우두머리는 도시 큰손의 사위이고, 왕웨이에게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다 말해 주지 않는 과거가 있다. 대사도 많다. 많은 평이 그 대사가 어색하다고 했고 나도 그렇게 들었다. 더빙이 입과 맞지 않는 대목이 있고 조연 몇몇은 대사를 읽는 것처럼 들린다.

분노의 추격 스틸컷

두 영화가 같은 문제를 어떻게 다르게 푸는지는 마지막 싸움에서 가장 잘 보인다. 앞의 영화의 마지막은 형제 둘과 싸움꾼 하나다. 형은 조직 사람이고 동생은 경찰이다. 두 사람이 같은 편에 서서 한 사람을 상대하는 그 몇 분이 영화가 형제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의 전부다. 설명하지 않고 같이 싸우게 한다. 뒤의 영화의 마지막은 다섯이다. 왕웨이와 나빈, 그리고 우두머리와 활잡이와 민머리 거한. 장소는 경찰서다. 제작진은 이 장면을 위해 옛 상가 자리에 경찰서 세트를 짓고 열여드레를 찍었다고 한다. 원래 넷이 싸우는 장면이었는데 감독이 다섯째를 더했다고도 한다. 이 싸움은 앞의 영화와 달리 말을 한다. 활잡이는 싸우다 말고 나빈의 아내를 죽인 것이 자기라고 밝히고, 나빈은 칼에 찔리면서 상대의 목을 물어 끊는다. 우두머리는 그 전에 제 편 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온 터라 잃을 것이 없다. 싸움 하나에 사연 셋이 얹혀 있다.

그러니까 앞의 영화는 사연을 빼서 싸움을 가볍게 했고, 뒤의 영화는 사연을 얹어서 싸움을 무겁게 했다. 어느 쪽이 이겼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무엇을 택했는가를 보는 편이 낫다. 앞의 영화는 관객이 싸움 자체를 보게 하는 쪽을 택했다. 라마가 왜 싸우는지는 처음 몇 분이면 충분하고, 그다음부터는 몸이 몸을 이기는 방식만 본다. 그래서 그 영화는 101분으로 끝났고, 그래서 지금까지 액션 영화의 기준으로 불린다. 뒤의 영화는 관객이 싸움을 보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걱정하게 하는 쪽을 택했다. 아이들이 나온다. 아홉 살 레이니는 갇힌 곳에서 스스로 탈출을 시작하고, 자기를 꾀어냈던 다리 저는 소년과 끝에는 손을 잡고 죽음을 기다린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권법을 가르친 적이 있다는 것은 그 전에 나온다. 싸움 바깥에 지켜야 할 것이 있으면 싸움은 길어져도 견딜 수 있다. 대신 값을 치른다. 어떤 평은 마지막 막이 너무 길다고 했고, 어떤 평은 아이들을 지킨다는 명분이 과한 폭력의 면죄부로 쓰였다고 했다. 둘 다 사연을 얹은 값이다. 나는 그 값을 치를 만했다고 보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의 논리도 성립한다.

분노의 추격 포스터

한 가지만 더. 앞에서 미친개였던 배우는 여기서 활을 들고, 앞에서 분대장이었던 배우는 여기서 기자가 되어 죽는다. 열네 해 사이에 같은 몸들이 건물을 나와 도시로 갔고, 싸움에 말을 얹었다. 앞의 영화의 침묵은 지금도 미덥다. 뒤의 영화는 끝나고 나면 걱정했던 아이 둘의 얼굴이 남는다. 침묵에는 없던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오래 남을지, 나는 아직 답을 갖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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