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분노의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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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를 스피커에 갖다 대면

막판뒤집기· 2026. 10. 29.· 2,457자

낡은 건물에 갇힌 아이들을 찾아낸 밤, 기자 나빈이 휴대전화를 켠다. 죽은 아내의 계정으로 생방송을 시작한다. 보는 사람이 생기고, 보는 사람이 늘수록 경찰이 모른 척하기 어려워지고, 상관의 지시를 어긴 경사가 출동한다. 길에 있던 사람들까지 아이들을 끌어내는 일에 손을 보탠다. 《분노의 추격》에서 내가 가장 오래 생각한 장면은 주먹이 오가는 장면이 아니라 이 장면이다. 이 영화의 결말을 원리 하나로 읽어 보려 한다. 되먹임이다. 틀릴 수 있다. 그래도 한번 대 보겠다.

되먹임이란 무엇인가

결과가 원인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되먹임이라고 한다. 되돌아가서 원인을 키우면 양의 되먹임, 줄이면 음의 되먹임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하루에 몇 번씩 겪는 일이다. 마이크를 스피커 앞에 가져가면 소리가 난다. 스피커에서 나온 작은 소리가 마이크로 들어가고, 커져서 다시 나오고, 또 들어간다. 몇 바퀴 돌면 귀를 찢는 소리가 된다. 그게 양의 되먹임이다. 눈 덮인 비탈에서 눈덩이가 구르면 커지고, 커지면 더 많은 눈을 묻히며 더 빨리 구른다. 은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돌면 사람들이 돈을 찾으러 줄을 서고, 줄이 길어지면 소문이 사실이 되고, 더 긴 줄이 선다. 셋 다 같은 모양이다. 한 바퀴 돌 때마다 커지고, 스스로는 멈추지 않는다.

반대쪽도 있다. 방이 더워지면 난방이 꺼지고 식으면 켜지는 온도 조절기. 자전거가 왼쪽으로 기울면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바로 세우는 몸. 이쪽은 흔들릴수록 되돌아온다. 음의 되먹임이다. 세상이 대체로 가만히 있는 것은 이쪽이 많아서고, 가끔 무너지는 것은 앞쪽이 이겨서다. 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한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이걸 영화에 대 보는 일이고, 거기서부터는 내 풀이다.

분노의 추격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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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양의 되먹임 고리가 둘 있다. 하나는 위에 적은 생방송이다. 그 전까지 두 남자는 고리를 돌리지 않았다. 격투 클럽에서도 얼음 공장에서도 둘은 그냥 더 세게 쳤다. 더 세게 치면 더 센 사람이 나왔다. 그건 되먹임이 아니라 그냥 계단이다. 생방송은 다르다. 보는 사람이 늘면 경찰이 움직이고, 경찰이 움직이면 더 큰 일이 되고, 더 큰 일이 되면 더 많이 본다. 두 남자가 처음으로 자기 손을 떠난 힘을 쓴 순간이다. 그리고 그 힘은 그들을 구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나왔지만 둘은 붙잡혀 경찰서에 갇힌다. 고리는 누구 편도 아니다. 커지기만 한다.

다른 하나는 우두머리 파클룽이다. 처음 그는 안경을 쓰고 말씨가 조용한 사업가다. 장인이 도시의 큰손이고, 아내는 아이를 가졌다. 조직이 흔들리자 그는 장인과 측근들을 죽이고 경찰서장을 죽인다. 그 와중에 임신한 아내를 제 손으로 잘못 찔러 죽인다. 여기서 고리가 한 바퀴 더 돈다. 아내를 잃은 그는 잃을 것이 없어졌고, 잃을 것이 없으니 경찰서로 쳐들어가 경찰들을 죽인다. 죽일수록 잃고 잃을수록 죽인다. 마이크와 스피커다. 소리는 그가 내는 게 아니다. 고리가 낸다. 영화가 이걸 알고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악당을 처음에 가장 조용한 사람으로 두었다는 것은, 소리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고리에서 나온다는 걸 보여 주려는 설계처럼 읽힌다. 추측이다.

양의 되먹임은 저절로 멈추지 않는다. 밖에서 끊어야 멈춘다. 마이크를 끄거나, 눈덩이가 바닥에 닿거나, 은행이 문을 닫거나. 경찰서의 마지막 싸움은 어림잡아 십 분에서 십오 분이라고 한다. 다섯이 싸운다. 활잡이는 기자에게 목을 물려 죽고, 기자는 활잡이의 칼에 죽고, 거한은 제 우두머리의 손에 죽고, 우두머리는 말 못하는 아버지의 주먹에 머리를 맞고 죽는다. 다섯 중 넷이 죽어야 소리가 멈춘다. 눈덩이가 바닥에 닿는 것이다. 이 결말은 되먹임으로 보면 거의 정확하다. 고리는 밖에서 끊는 사람이 없으면 재료가 떨어질 때까지 돈다.

분노의 추격 포스터

안 맞는 곳도 있다. 되먹임은 왜를 말해 주지 않는다. 마이크는 누구를 미워해서 우는 게 아니고, 눈덩이는 아래 있는 집에 아무 감정이 없다. 그런데 영화는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를 고르고 있다. 기자는 죽고 아버지는 산다. 원리로는 둘 다 고리 안에 있었고, 둘 다 죽거나 둘 다 살아도 이상할 게 없다. 영화가 아버지를 살린 것은 원리가 아니라 뜻이다. 딸이 있으니까. 그리고 한 달 뒤, 아버지와 딸과 다리 저는 소년과 경사가 바다에 기자의 재를 뿌린다. 아버지는 딸에게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한다. 말을 못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이건 되먹임의 반대다. 커지는 고리가 아니라 가라앉히는 고리다. 온도 조절기이고, 핸들을 꺾는 손이다.

우주에는 되먹임이 있고 뜻은 없다. 소리가 커지는 데 이유는 없고, 눈덩이가 멈추는 데도 이유는 없다. 그런데 사람은 그 고리 한가운데서 누구를 살릴지 고르고, 다 끝난 바닷가에서 재를 뿌리고, 못 하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뜻 없는 고리 위에 뜻을 얹는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고, 이 영화는 두 시간 가까이 주먹을 휘두른 끝에 그걸 한다. 내 계산이 틀렸을 수 있다. 그래도 마지막에 재를 뿌리는 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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