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분노의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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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 안경, 활

밤선율· 2026. 10. 29.· 2,129자

「내 카운터에 피를 다 흘리고 있잖아.」 딸을 빼앗기고 맨발로 경찰서에 들어온 남자에게 경찰 하나가 하는 말이다. 남자는 말을 못한다. 대답 대신 피 묻은 발자국을 남기고 나간다. 나는 이 영화의 대사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다들 어색하다고 했고 맞는 말이다. 대신 물건을 기억한다. 《분노의 추격》은 사람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물건으로 한다. 셋만 고른다.

물건 1 · 슬리퍼

왕웨이는 수리공이다. 딸과 다투고 딸이 뛰쳐나가고, 얼마 뒤 그 딸이 트럭에 실린다. 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로 뛴다. 달리는 트럭에 뛰어올랐다가 떨어지고, 깨진 유리 위를 달린다. 한 평은 이 영화에서 제일 오래 남는 것으로 그 슬리퍼가 땅을 치는 소리를 꼽았다. 나도 그렇다. 판정은 맞다. 이유는 간단하다. 준비 없이 싸움에 끌려 나온 사람의 신발은 슬리퍼여야 한다. 신발이 벗겨지고 발이 피투성이가 되는 데 몇 분이면 된다. 그 발로 경찰서에 들어가니 위의 대사가 나온다. 신발 하나가 이 남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다 말한다.

그다음에 그가 집어 드는 것이 망치다. 격투 클럽에 쳐들어갈 때 손에 든 것이 수리공이 쓸 법한 작은 망치다. 나는 주인공이 첫 싸움부터 제 전용 무기를 꺼내 드는 영화가 싫다. 그런 무기는 영화 밖에서 디자인된 물건이지 그 사람의 물건이 아니다. 이 망치는 다르다. 수리공이 쓰던 것이다. 얼음 공장에서 상대편 거한이 들고 나오는 것이 큰 해머라는 것도 맞다. 작은 망치와 큰 해머. 두 사람의 체급과 직업과 성격이 연장 두 개로 끝난다. 설명이 필요 없다.

분노의 추격 스틸컷

물건 2 · 안경과 양복

조직의 우두머리 파클룽은 처음에 안경을 쓰고 단정한 양복을 입은 조용한 사람으로 나온다. 장인이 도시의 큰손이고, 사업가 행세를 하고, 임신한 아내를 아낀다. 활을 쏘는 부하가 트레이닝복이고 거한이 민머리라면, 이 남자만 넥타이를 맸다. 이 영화에서 거짓말을 하는 옷은 이것 하나다. 나머지 옷은 전부 사실대로다. 그래서 판정도 맞다. 옷이 거짓말을 하려면 영화에 거짓말하는 옷이 하나만 있어야 한다. 둘이면 관객이 눈치챈다.

더 좋은 건 그 거짓말이 벗겨질 때 옷은 안 벗겨진다는 점이다. 그는 조직이 무너지자 제 식구들까지 죽이고, 그 차림 그대로 경찰서에 들어온다. 양복 입은 미치광이가 경찰서를 피로 칠한다. 만약 마지막에 그가 안경을 벗어 던지고 웃통을 드러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껐을 것이다. 그건 변신이고, 변신은 설명이다. 이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안경 쓴 그대로 사람을 죽인다. 그 편이 훨씬 무섭다.

물건 3 · 활

활잡이 탁은 좁은 건물 안에서 활을 쏜다. 화살이 떨어지면 활대를 칼처럼 휘두르고, 그것도 안 되면 큰 칼을 꺼내고, 끝에는 다 버리고 맨손이다. 판정은 틀렸다. 활은 거리를 두고 쓰는 물건이다. 복도에서, 경찰서 안에서 활을 든다는 건 무기 선택이 틀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틀림이 이 남자를 설명한다. 그는 효율로 무기를 고르는 사람이 아니다. 좋아서 고르는 사람이다. 영화는 그에게 이유를 주지 않는다. 그냥 활을 든 사람이고, 그 활이 아이들을 향한 적도 있다. 무기가 틀렸기 때문에 인물이 맞는다. 이런 경우가 가끔 있다.

그리고 자전거. 경찰서 마지막 싸움에서 사람들이 자전거를 두 손으로 쥐고 칼처럼 휘두른다. 페달로 치고 체인으로 목을 조른다. 활과 정반대의 물건이다. 아무도 고르지 않은, 그냥 거기 있던 것. 이 영화의 가장 좋은 물건은 그래서 자전거다. 고른 무기는 사람을 설명하고, 안 고른 무기는 장소를 설명한다. 경찰서에 자전거가 굴러다니는 도시. 그 도시가 어떤 곳인지 이 한 장면으로 안다.

덤으로 하나. 얼음 공장에서 사람들이 커다란 얼음 덩어리 속에 갇혀 있는 장면은 틀렸다. 멋을 부린 티가 난다. 이 영화에서 세트가 사람보다 앞에 나선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그런데 그 공장에서 잘린 머리가 얼음 바닥 위로 미끄러져 가는 컷 하나는 맞다. 물건이 연기하는 게 아니라 바닥이 연기하니까. 얼음은 장식으로 쓰면 틀리고 바닥으로 쓰면 맞는다. 같은 재료다.

분노의 추격 포스터

음악 얘기를 안 했다. 전자음으로 깔리는 초조한 소리인데, 나는 이 음악보다 슬리퍼 소리와 목뼈 부러지는 소리를 더 많이 기억한다. 그것도 판정이다. 소리가 물건에 졌다. 이 영화에서는 그게 맞는 결과다.

볼까 말까 묻는다면, 보라. 그리고 소리를 키워라. 슬리퍼 소리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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