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6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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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빼고 잰 숫자
8퍼센트.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오래 들여다본 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화면에 뜬 이 숫자다.
사정은 이렇다. 마흔셋의 브리짓은 음악 축제에서 만난 미국인 잭과 하룻밤을, 한 주 뒤 세례식에서 만난 옛 연인 마크와 하룻밤을 보내고 임신한다. 잭은 짝을 찾아 주는 사이트를 만들어 큰돈을 번 사람이고, 그 사이트는 두 사람의 궁합을 백분율로 내놓는다. 잭이 브리짓에게 말한 둘의 궁합은 97퍼센트다. 영화 뒤쪽에서 마크가 그 사이트에 자기와 브리짓의 이름을 넣어 보는데, 거기서 나오는 숫자가 8이다. 마크는 그 숫자를 받아 들고, 흔들린다.
이 영화에는 숫자가 많다. 브리짓은 담배를 끊은 지 천 일을 넘겼고 목표 체중에 닿았고 뉴스쇼 PD가 됐다. 전편들에서 그가 일기에 적던 숫자들이 거의 다 채워진 셈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 숫자들을 다 채운 사람이 마흔셋 생일 밤에 혼자 컵케이크의 초를 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채워야 할 숫자를 다 채우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 다 채우고 나서 혼자 있다. 이 영화의 숫자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하고, 궁합 97과 8은 그 뒤에 온다. 내 숫자를 다 채운 사람 앞에 이번에는 남의 숫자가 놓이는 것이다.
백분율은 비교하려고 만든 숫자다. 8만 따로 있으면 아무 뜻이 없다. 97 옆에 놓여야 8은 비로소 비참해진다. 이 영화가 잘한 것 하나는 두 숫자를 같은 사람에게 보여 준 것이다. 97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8을 가진 사람에게. 잭은 자기 숫자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느긋하다. 마크는 자기 숫자를 모르다가 뒤늦게 알게 되고, 그래서 흔들린다. 숫자를 안다는 것이 사람을 느긋하게도 하고 흔들리게도 한다. 이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숫자를 언제 아느냐의 문제다.
나는 궁합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안 믿는 편도 아니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내가 몇 퍼센트인지 궁금했던 적은 없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내가 몇 퍼센트인지는 가끔 궁금했다. 알고 싶은 쪽이 꼭 더 불안한 쪽이다. 그러니 잭의 사이트에 이름을 넣는 사람이 잭이 아니라 마크인 것은 정확하다. 97을 가진 사람은 사이트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여기서 숫자 하나가 더 나온다. 50이다. 브리짓이 어머니에게 아기 아버지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마크일 가능성이 적어도 50퍼센트는 된다고 답하는 장면이다. 마크, 그리고 잭이라는 아주 괜찮은 미국인. 이 50은 잭의 97이나 마크의 8과 다른 종류의 숫자다. 97과 8은 사이트가 계산한 것이고, 50은 브리짓이 아무 계산 없이 낸 것이다. 후보가 둘이니 반반. 초등학생도 낼 수 있는 숫자고, 바로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숫자다. 사이트는 두 사람이 얼마나 맞는지를 소수점까지 재는 척하지만, 아기가 누구 아이인지는 반반밖에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정밀한 궁합 계산기가 제일 중요한 질문에는 반반이라는 답밖에 못 낸다. 이 대비를 영화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다. 의도하지 않았다면 더 좋다.
산부인과 의사도 숫자를 쓴다. 이 의사는 아빠가 누구냐는 문제를 두고 오디션 프로그램의 전화 투표처럼 마크는 01번, 잭은 02번이라고 농담한다. 01과 02. 궁합을 97과 8로 내놓는 사이트와 01, 02를 내놓는 의사 사이에서 나는 의사 쪽이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투표는 애초에 재는 게 아니라 고르는 것이다. 의사는 이것이 계산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이트는 그걸 모른다. 아니, 사이트를 만든 잭이 그걸 모른다.
97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잭은 브리짓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정말 좋을 수 있다고, 97퍼센트라고 말한다. 브리짓의 대답은 종이 위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사랑은 종이 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때로는 나와 닮지 않은 이유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때로는 그 사람이 그저 집처럼 느껴져서 사랑한다고. 나는 이 대사를 영화에서 가장 좋은 대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완성된 문장이고, 브리짓은 완성된 문장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대사가 97이라는 숫자 바로 뒤에 온다는 것은 중요하다. 숫자가 먼저 나오고 문장이 그것을 지운다. 영화 전체가 이 순서로 되어 있다. 사이트가 숫자를 내고, 사람이 그 숫자를 지운다.
그런데 8이 남는다. 나는 이 영화가 8을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든다. 영화는 8이라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마크가 선택되는 것을 보여 주지만, 8이 왜 8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이유는 단순하다. 사이트는 지금의 두 사람을 잰다. 좋아하는 것, 사는 방식, 아마 나이. 마크는 일 전화를 끊지 못하는 변호사고 브리짓은 뉴스쇼 PD다. 지금만 보면 맞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십몇 년이 있다. 사이트에는 「몇 년 전에 서로를 사랑한 적이 있는가」를 적는 칸이 없다. 그 칸이 있었다면 8은 다른 숫자가 됐을 것이다. 다시 말해 8은 틀린 숫자가 아니라 시간을 빼고 잰 숫자다.
시간을 빼고 잰다는 것. 나는 요즘 그런 숫자를 자주 본다. 오늘 걸은 걸음 수, 이번 달에 쓴 돈, 어젯밤 잔 시간. 다 지금을 재는 숫자들이고, 하나같이 정확하다. 그러나 그 숫자들로는 내가 어떤 사람과 십 년을 알고 지냈다는 사실을 표시할 수 없다. 정확한 숫자와 중요한 숫자는 다르다. 8은 정확하고, 50은 중요하다. 이 영화는 그 둘을 한 화면에 올려놓지는 않지만, 두 시간 동안 번갈아 보여 준다.
물론 이것은 내 풀이다. 영화를 만든 쪽은 8과 97을 그저 웃기려고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97이 나올 때 잭은 잘생겼고 8이 나올 때 마크는 안쓰러우면 그것으로 충분한 장면이다. 숫자 하나로 영화 전체를 읽겠다는 사람은 대개 숫자에 영화를 끼워 맞춘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 그래도 끼워 맞춰지는 영화가 있고 안 되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는 됐다.
마지막 숫자는 화면에 뜨지 않는다. 아기가 태어나고 의사가 두 남자를 데리고 가서 검사를 하고, 결과는 마크다. 이 검사는 퍼센트를 내놓지 않는다. 맞거나 틀리거나다. 97과 8, 50, 01과 02를 거쳐 온 영화가 마지막에 받는 숫자는 백분율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조금 쓸쓸했다. 두 시간 내내 숫자를 가지고 놀던 영화가 마지막에는 숫자가 필요 없는 자리에 도착한다. 거기서는 8이었던 사람이 아버지가 되고, 97이었던 사람이 축하한다.
8퍼센트란 무엇인가. 시간을 빼고 잰 숫자다. 그러니 당신이 누군가와 8이 나왔다면 몇 년 뒤에 다시 재 보시라. 아니, 재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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